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이 나서 병원을 가려면 하루를 꼬박 써야 해요.”
경북 북부의 한 농촌 마을 주민 A씨(82)는 몸이 불편해도 병원 가기를 꺼린다. 마을에는 병원이 없고, 버스는 하루 몇 차례뿐이다. 그는 가까운 보건진료소를 찾지만, 할 수 있는 진료가 제한적이어서 큰 병은 결국 도시 병원을 가야 한다.
농촌의 현실은 통계로도 확인된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읍·면 거주자의 공공의료기관 이용률은 3.1%에 불과하다. 고령 인구 비율은 높아지고, 만성질환·치매·말기 돌봄 수요가 늘어나고 있지만, 지역 의료자원은 갈수록 줄고 있다. 공중보건의 배치도 축소돼 한 명이 여러 지역을 순환 근무하는 경우가 흔하다.
이처럼 농촌 의료가 붕괴 직전이라는 평가 속에서 다시 주목받는 곳이 있다. 바로 보건진료소다.
보건진료소, 45년째 자리를 지켜온 공공의료 거점
보건진료소는 1977년 시범사업으로 출발해 1981년 전국에 확대됐다. 현재 1895개소가 운영 중이며, 보건진료 전담공무원이 배치돼 경미한 진료와 만성질환 관리, 예방접종, 감염병 대응, 보건교육 등 기초적인 서비스를 제공한다.
보건진료소는 ‘마을 가까이에 있는 의료기관’이라는 장점이 있지만 역할과 권한은 제한적이다. 현행 법제도는 보건진료소를 ‘의사가 없는 곳을 보완하는 기관’ 수준으로 규정하고 있어 방문진료나 지역 돌봄 서비스는 충분히 확대되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최근 경북 의성에서 방문의료 시범사업이 시행됐지만, 제도적 뒷받침이 없어 한계가 드러났다.
현장 설문조사, “보건진료소 더 강화해야”
지난 8월 보건진료소장회가 전국 회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는 현장의 목소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응답자의 71.8%가 전문간호사 수준의 교육훈련을, 69.9%가 실기 중심 역량강화 교육을 원한다고 답했으며, 방문진료 표준지침 마련(78.5%)과 원격 자문 시스템 도입(63.1%)도 높은 지지를 얻었다.
또 권역 단위의 방문진료 전담팀 구성(65.9%), 복수 인력 배치(61.8%), 방문진료 표준지침 마련(61.6%) 등 제도적 보완을 요구하는 의견도 이어졌다. 이는 단순한 보건진료소 운영 차원을 넘어, 농어촌 주민의 건강권 보장을 위해 보건진료소의 역할과 권한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는 현장 목소리로 해석된다.
보건진료소장회 김영남 회장은 “현장의 간절한 목소리가 그대로 드러난 결과”라며 “보건진료소가 농어촌 주민의 건강을 지키는 핵심 기반시설로 자리매김하도록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해외는 이미 간호사 역할 확대
세계 주요 국가들은 농촌 의료 공백을 해소하기 위해 간호사의 역할을 크게 넓히고 있다. 일본은 40여 개 전문 프로토콜에 따라 간호사가 특정 의료행위를 독립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또 미국, 캐나다, 호주 등은 간호사가 농촌·벽오지에서 독립적 진단과 처방 권한을 가지고 활동한다.
반면, 한국의 보건진료소장(보건진료 전담공무원)인 간호사는 제한된 지침 속에서만 활동할 수 있어 주민의 실제 요구를 충족하기 어렵다. 전문가들은 보건진료 전담공무원의 교육과 권한을 확대하고, 국제적 수준에 맞춘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보건진료소 역할 확대는 농어촌의료법 개정이 열쇠
보건진료소장회는 현장 조사와 설문 결과를 토대로 △보건진료 전담공무원 교육 최소 52주 이상 확대 △전문간호사 수준의 역량 강화 △방문진료 지침 개정위원회 상설 운영 △보건진료소를 지역보건의료기관 체계에 편입 △복수 인력 배치와 운영협의회 재정비 등을 제안했다.
이러한 제안은 단순히 보건진료소 내부 문제를 넘어, 농어촌의 의료격차와 건강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국가적 과제로 평가된다.
농촌 의료의 ‘생명선’… '보건진료소'
전문인력 양성과 제도 개선이 이루어질 경우 보건진료소는 농촌 주민들에게 △치료 연속성 확보, 불필요한 도시 이송 감소 △조기 퇴원 유도, 병상 회전율 증가와 의료비 절감 △만성질환·돌봄 서비스 제공으로 노인의 건강권 보장 △지역 간 의료격차 완화 및 건강 형평성 제고 등과 같은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OECD 역시 한국 보건의료 체계의 지역사회 중심 재설계를 권고한 바 있다. 보건진료소는 그 권고를 실현할 수 있는 핵심 제도다.
농촌의 고령화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다. 교통·의료 인프라가 부족한 농촌에서 보건진료소는 단순한 ‘보조 기관’이 아니라 주민의 생명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다.
농촌 주민이 도시 주민과 같은 수준의 건강권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보건진료소의 역할 확대와 제도 개선이 더 이상 미뤄져서는 안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