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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회 간호문학상 - 소설 가작
[편집국] 편집부   news@koreanurse.or.kr     기사입력 2019-12-24 오전 08:30:06

처방으로 쓴 자서전 ‘내가 만난 자유’

김효영(수원시행복정신건강복지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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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가 결혼을 한다. 나와 가장 친한 친구이자, 친구 중에는 마지막 싱글이었다. 요즘은 늦게 결혼한다고 하는데, 서른여섯 내 친구들은 이미 다들 결혼을 했다. 내겐 너무 어려운 결혼이라는 숙제가 남들에겐 참 쉽다.

지혜는 주례 없는 결혼식을 한다며 내게 편지를 부탁했다. 나 말고도 덕담 형식으로 친구들, 직장 상사, 사촌 동생이 편지를 읽을 예정이라고 한다. 나는 기꺼이 하겠다고 했다. 지혜의 기쁜 앞날을 축복해주고 싶었다.

참 오랜만에 내가 글 쓰는 것을 좋아했었던 사람이라는 것이 생각이 났다. 학창시절엔 종종 글쓰기로 상도 받았고, 고등학교 때엔 스승의 날에 전교생 앞에서 편지를 읽어 선생님을 감동시키기도 했었다.

오랜만에 문구점에 가서 편지지를 사와 이렇게 책상 앞에 앉으니 옛날 생각이 저절로 난다. 그래,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참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친구들은 내가 시인이 될 것 같다고 이야기했었다.

어떤 말을 해야 할까 떠올려가며 한 줄, 한 줄 지혜에게 전하고 싶은 진심을 담아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너를 아니까. 네가 현수 씨를 소개시켜줬을 때에, 왜 현수 씨를 좋아하는지 알겠더라. 그리고 기뻤어. 현수 씨야 말로, 너를 가장 너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줄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거든.’

진심이었다. 많은 나이 차이로 주변에선 걱정했으나, 나는 그 둘이 누구보다 천생연분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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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고 사랑받는 삶이야말로 가장 의미 있는 삶이라고 생각해. 많이 사랑하고 많이 사랑받으며 행복한 결혼생활을 해나가길 바라. 너의 새로운 시작을 응원해!’

손을 부들부들 떨며 편지를 다 읽었고 지혜의 눈에도, 지혜 어머니의 눈에도 눈물이 맺혀있었다.

나는 사실 좀 걱정했었다. 내 편지가 재미없을까봐...... 요즘 사람들은 참 재밌고 유쾌하다. 오늘 덕담의 시간에도 어떤 커플은 만담도 하고, 유머도 센스 있게 척척 해냈다. 나도 편지내용을 몇 번이고 숙지하면서, 이야기하듯 덕담을 할 생각이었으나, 막상 사람들 앞에 서니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래서 결국 편지지를 보고 읽었다. 그래도 내 진심이 잘 전달된 것 같아서 참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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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는 지방에서 올라온 나를 위해 호텔을 예약해줬다. 결혼식 비용을 아낀다고 늦은 오후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며 미안해했다. 나는 괜찮다고 거절했지만, 지혜가 한사코 예약을 했다. 그 김에 보고 싶었던 최원의 콘서트를 예약하게 되었다. 내 인생의 첫 콘서트였다. 내 마음은 10대 소녀처럼 떨리고 설렜다.

지혜의 결혼식이 끝나고 바로 홍대 공연장으로 이동했다. 공연 전 화장실에 들러 손을 씻다가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봤다. 이렇게 화장한 내 모습이 어색하면서도 기분이 썩 괜찮았다. 쌍꺼풀이 없어 색조화장을 잘 하지 않는 거라고 핑계를 대곤 했지만, 사실 색조화장을 할 만큼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여유로운 인생은 아니었다. 지혜는 결혼식 패키지에 어머니 두 분의 메이크업 가격도 포함이 되어 있는데, 시어머니가 남편 어렸을 적에 일찍 돌아가셔서 안계시기 때문에, 내가 대신 메이크업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래서 처음으로 메이크업을 받아보게 된 것이다. 메이크업뿐만 아니라 머리도 만져주었다. 1년에 한두 번밖에 미용실에 가지 않지만 나는 미용실을 참 좋아했다. 누군가 내 머리를 만져주면 나는 몹시 졸리고 편안했다.

최원은 지난 2년 동안 내가 사는 전주에서 ‘원더라디오’를 진행했었다. 무명의 인디가수였던 그가 세상의 주목을 받은 건, 드라마 ‘사랑의 도시’로 인기를 끌었던 ‘송채연’과의 열애설 때문이었다. 이 무명가수와 톱스타의 사랑 이야기는 그 당시 한 달 넘게 포털 사이트 검색어를 오르내렸다. 그러나 3년여의 열애 끝에 결별했고, 일 년 뒤 송채연은 같이 드라마를 찍었던 강지훈과 결혼을 했다.

그 뒤 최원은 지인의 권유로 지방방송의 라디오를 맡게 되었다. 원더라디오는 나의 안식처였다. 그가 들려준 음악들은 내 취향과 잘 맞았고, 수많은 사연들, 그가 들려준 이야기들은 내게 큰 위로가 되었다. 그가 다시 음악활동을 위해 라디오를 그만두게 되었을 때 나는 몹시 아쉬웠지만, 그의 새로운 시작을 응원했다. 그리고 얼마 전 새 음반을 내고 소극장 공연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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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도 환호도 없는, 숨소리조차 내기 힘든 고요함이 소극장을 가득 메웠다. 피아노 한 대, 기타 하나, 그리고 첼로 하나로 아주 작은 구성이었다. 그 고요함 속에 단 하나, 최원의 목소리만이 공연장을 꽉 채웠다. 화려한 조명도, 휘황찬란한 무대 장치도 없지만, 오로지 음악에 집중할 수 있는 그런 환경이었다. 나는 편안하게 앉아, 턱을 괴기도, 눈을 감기도 하면서 음악에 집중하기 위해 애썼다. 내가 가장 위로를 받았던 곡 ‘사랑해, 있는 모습 그대로'가 나왔을 때에는 갑자기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나는 방해가 될까 걱정하면서 휴지로 눈과 코를 애써 틀어막았다.

참 주책이다. 이렇게 좋은 공연에 와서...... 왜 눈물이 나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내 마음은 그대로 흘러내려버렸다. 그의 목소리는 너무 감격스러울 정도로 좋았다. 나의 공허는 최원의 목소리 하나로 가득 찼고, 그의 목소리는 마음을 마구 흔들어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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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로 돌아왔다. 욕조가 있다는 정보를 보고, 입욕제를 사왔다. 내가 늘 꿈꾸는 집은 욕조가 있는 집, 베란다가 있는 집이다. 다양한 바디용품으로 향긋한 욕실과 넓은 창 너머로 따스한 햇살이 들어오는 집은 내 로망이자 내가 꿈꾸는 안식처이다.

물속에 몸을 담그며 오늘 하루를 곱씹어 봤다. 친구의 결혼, 최원의 목소리...... 참 좋았다. 오늘이 어제도 내일도 없을 가장 행복한 날인 것만 같았다.

욕조에서 나와 스킨을 바르며 거울을 보니, 이마에도 눈가에도 잔주름 제법 생겼다. 언제 내 얼굴이 이렇게 된 걸까. 한 때에 나도 동안이라는 이야기를 제법 들었었는데...... 메이크업 했을 때에 셀카라도 찍어둘 걸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창밖으로 반짝이는 서울 야경이 너무 아름다웠다.

 

*

몹시 피곤했지만, 낯선 환경에서 나는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했다. 수많은 생각들이 떠올라 괴롭기까지 했다.

사실 요즘 좀 허무한 기분을 지우지 못했다. 동생이 올케와 함께 사흘 후면 수단으로 떠난다. 내 유일한 피붙이인 선우가 먼 곳으로 떠난다고 하니 서운하고 아쉬운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선우도 얼마 전에 결혼을 했다. 대학 때부터 사귀던 여자 친구를 계속 만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렇게 빨리 결혼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는 못했다. 사실 그 여자 친구와 결혼까지 할 것이라는 것도 애초에 상상하지를 못했다. 여자 친구의 나이에 대한 편견 때문이었을 것이다. 올케는 나와 동갑이다.

올케는 목사 아버지 밑에서 자란 첫째 딸이었다. 늘 선교에 꿈이 있었고, 존경하던 선교사님이 얼마 전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선교사님이 계셨던 수단에 본인이 가야겠다고 결정했다. 그리고 올케는 선우도 함께 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선우는 쉽사리 결정하지 못했다. 그건 오롯이 나 때문이었다. 가고 싶다는 말도 차마 꺼내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그 사실조차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올케가 나를 찾아와 부탁을 했다. 동생이 마음 편하게 함께 떠날 수 있게 도와 달라고...... 마음은 많이 서운했지만, 나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올케의 부모님, 그러니까 사돈 어르신들은 둘이 조촐하게나마 결혼을 하고 떠났으면 하셨다. 부모가 없다는 것이 사돈댁에 괜히 미안했다. 사고로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이 나의 탓도 아닌데 괜히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홀로 남겨질 누나 때문에 불편한 마음이 들게 한 것도, 내가 결혼을 하지 않은 것도 동생, 올케, 사돈 어르신께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었다.

사돈 어르신들은 참 좋으셨다. 전혀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아하셨고, 결혼식에 초대할 사람이 없어 걱정을 했는데, 많은 교회 분들이 도와주고, 결혼식도 가득 메워주어 더할 나위 없는 풍성한 결혼식이 되었다.

결혼식에서 올케가 유난히 돋보였다. 너무 생글생글 웃어서 사돈 어르신들을 서운하게 만들었지만, 어쩜 저렇게 밝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참 예뻐 보였다.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면, 나도 저런 환경 속에서 자랐다면, 올케처럼 예뻤을까?

문득 지혜에게 쓴 편지에서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사는 삶이 가장 의미 있는 삶’이라고 생각한다는 나의 글에 코웃음을 쳤다. 내가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맞는 걸까? 마음은 항상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나의 삶은 그렇지 못했다. 내가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는 걸까?

대학시절, 나를 좋아해주던 남자들에게 지금은 공부가 좋아 연애는 관심 없다며 핑계를 댔지만, 나는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했고, 장학금을 받지 않으면 생활이 힘들었기에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는 제자리걸음인 내 경제 상태와 동생 뒷바라지 때문에 나는 평생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핑계를 대었다. 나는 자존심 때문에 내가 겪고 있는 상황을 누구에게도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사랑했던 사람에게 조차, 나의 불행이 짐이 될까봐 그 마음을 쉽게 표현하지 못했다. 나는 그렇게 사람들에게 벽을 쳐가며 어느 덧 서른여섯을 맞이하게 되었다. 지금 내게 남은 것은 허무함과 주름살, 그리고 통장 잔고 천만 원뿐이다. 이런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고 사랑해 줄 사람도 있을까?

문득 뭔가 억울한 마음도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물론 동생이 공부를 특출 나게 잘 하기는 했지만, 나도 학창시절에 공부를 제법 잘 했다. 왜 나는 욕심 있게 나서지 못했던 걸까. 왜 내가 동생을 위해 희생을 해야 했던 걸까. 왜 할머니는 내가 늘 양보해 주기를 바랐던 걸까. 내가 누나라서? 아님, 여자라서? 그렇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동생이 나를 위해 희생했다면 내 마음도 편하지만은 않았을 것 같다.

나는 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최선을 다해왔다. 나는 속 깊은 손녀, 엄마 같은 누나로 최선을 다해 살았다. 나는 마더 테레사와 같은 사람들을 내 롤 모델로 여기고, 내 안의 모든 사랑을 아낌없이 타인의 행복을 위해 살았다. 나는 사랑을 주는 삶을 내 소명으로 여겼다. 나는 모두에게 친절한 사람이었으나, 막상 나 자신은 그 누구도 친밀한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어느 샌가 사람들이 짐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동생을 사랑했지만, 가끔은 동생이 떠안을 수밖에 없는 짐처럼 느껴졌고, 그런 느낌을 받을 때마다 나는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그렇다. 나는 사랑에 자만했었다. 나는 마더 테레사가 될 줄 알았는데, 결코 마더 테레사가 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 에너지는 고갈될 대로 고갈되어 버렸고, 몸과 마음이 몹시 지쳐버렸다.

 

*

동생네 부부와의 점심 약속 전에 보고 싶은 전시가 있었다. ‘청춘’이라는 주제로 여러 작가가 참여한 사진전이었다. 취향이 비슷한 지혜의 추천이라 꼭 가보고 싶었다.

정말 모던한 미술관이었다. 미술관 1층에는 ‘청춘의 위로, 마음 양호실’ 부스들이 있었다. 요즘 학자금 대출, 취업난 등 청춘들은 어려움이 많다. ‘청춘’이 전시의 주제인 만큼, 그들을 위로하고 응원하기 위해 정신건강 분야의 전문가들과 콜라보하여 마련한 이벤트였다. 오전이라 한산했기에, 나는 호기심에 그 부스에 들어가게 되었다.

몇 가지 심리검사가 진행되었다. 노트북으로 검사를 진행했기 때문에 검사 결과가 바로 나왔다. 나는 소진증후군 주의단계에 있다고 나타났으며, 전문가는 내게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물었다. 나는 내 상황에 대해서 조금만 이야기하려 했는데, 전문가가 각종 표정과 맞장구로 격한 공감을 나타내어 주고, 말을 계속 하도록 질문을 했기 때문인지, 내 인생에서 그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지 못했던 나의 마음들을 오늘 처음 본, 그리고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것 같은 이 사람에게 술술 꺼내어 놓기 시작했다.

학창시절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해서 작가가 되고 싶었다는 내게, 자서전을 한번 써보라는 처방을 내려주었다. 그는 문학, 음악, 미술과 같은 예술을 즐기는 것 혹은 내가 그 활동에 직접 참여하는 것이 소진증후군을 극복하는 것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지금의 생각들을 글로 써서 마음을 털어버리고 재충전하라고 한 것이다. 참 신선하다고 생각을 했다. 정말 글을 쓰면, 내 마음이 나아질까? 그래도 한 사람에게 말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 후련해졌다.

전시실로 올라가 작품들을 보았다. 사진은 너무 충격적일만큼 매력적이었다. 사진 속 주인공들은 나체인 상태로 산, 바다, 들판 등 대자연을 누볐다. 해방과 자유, 그 자체였다.

고요히 사진 앞에 앉으니, 어느샌가 액자 유리에 비친 나 자신과 마주하게 되었다. 텅 빈 들판에 덩그러니 남은, 나조차도 참 어색한 ‘나’라는 사람... 그리고 문득, 나는 내 자신을 한 번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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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네 부부와 서촌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문득 내 동생의 울타리가 되어준 올케에게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동생은 나를 서울역까지 데려다준다고 했지만, 나는 들를 곳이 있다는 핑계로 거절했다. 동생네 부부와 식당 앞에서 작별 인사를 하고선 뒤돌아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갔다. 길모퉁이쯤 뒤돌아보니 동생네 부부는 나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얼른 가라고 손짓하며 모퉁이를 돌아섰다. 그리고 발걸음에 가속을 냈다.

가벼웠다. 뛸 수도, 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전시회에서 봤던 뮤직비디오가 아른거렸다. 자유롭게 도심을 누비던 소녀의 가벼운 발걸음...... 그건, 내 인생에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진정한 자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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