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제39회 간호문학상 공모에서 수기부문 가작으로 선정된 작품 '당신의 일상 속 영웅은 누구인가요?'의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미국, 바람의 도시 시카고까지 날아와 간호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3년차 유학생입니다. 시카고 의료복합단지인 이곳에선 스타벅스 커피를 한아름 들고 환한 표정으로 병원에 들어가는 간호사들의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바로 미국 스타벅스에서 운영하는 'Everyday Heroes(일상 속 영웅들)'라는 프로그램 덕분입니다. 이는 소방관, 경찰, 군인 그리고 간호사들을 일상 속의 영웅들이라 칭하며 이들의 희생과 노고에 작게나마 보답하고 격려하기 위해 연중 할인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입니다.
미국인들은 소방관, 경찰, 군인 그리고 간호사들 덕분에 자신들이 자유롭고 안전하게 지낼 수 있다면서 이들의 '영웅적인 희생'에 대해 기발한 방법으로 감사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영웅 만들기의 정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이를 보는 '영웅'들은 시민들의 성원과 예우에 벅찬 감동을 느끼게 됩니다.
2005년만 하더라도 남자인 제가 간호대학에 다닌다고 소개하면 위아래로 훑어보며 다시 되묻곤 했습니다. 대학 졸업 후 군 병원에서 간호장교로 근무할 때도, 전역 후 사회에 나와 대학병원의 간호사로 근무할 때도 신기한 구경의 대상이 되는 것은 꽤 익숙해져야만 하는 일이었습니다.
간호대학생 시절, 실습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지하철역에서 사람들이 웅성웅성하며 모여 있기에 가보니 한 아저씨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 배웠던 심폐소생술 수업 내용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재빨리 인파를 헤치고 들어가 아저씨의 의식을 살폈습니다. 다행히 맥박과 호흡은 있었습니다. 저는 배운 대로 119에 연락하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는 아저씨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며 의식 상태를 확인하는 동시에 조심스럽게 바르게 눕혔습니다. 혈액순환을 원활히 하기 위해 허리띠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습니다. 얼마 후 구급대가 도착했고, 아저씨는 무사히 이송됐습니다.
그제서야 눈을 감고 제가 방금 무슨 일을 했는지 가다듬어 볼 수 있었습니다. 나약한 존재이던 제가 침착하게도 한사람의 위급한 상황에서 무언가 이바지 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늘졌던 제 마음에 알 수 없는 환희가 드리웠습니다. 그제야 이해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먼 길을 돌아 생각지도 못했던 곳으로 저를 이끌어왔던 그 섭리를. 남을 위해 살 수 있는 고귀한 길을 가고 있으면서도 항상 남과 비교하며 움츠렸던 제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이 일이 있은 이후 제가 가야 할 길이 확실히 보이게 되었고, 확신 없이 떠듬떠듬 걷던 걸음마에는 점차 힘도 붙고 이내 주위도 둘러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여태껏 보지 못했던 제 주위의 영웅적인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에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늘 우리의 곁을 지켜주었던 이들에 대한 감사와 격려의 메시지를 전하는 영웅 만들기의 정서가 아직 자리잡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제 동료들이 각자의 노력이 꽃을 피울 그 날이 올 때까지 일상 속에서 기쁨을 찾는 법을 배우고 좀 더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기를 바랍니다. 언젠가 세상이 우리를 필요로 할 때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다시 한 번 영웅이 되어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저 역시 간호사로서 경험하고 배운 존엄한 가치들을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것에 잘 녹여내어 앞으로 한국 시스템에 도입함으로써 차세대 영웅들을 배출하는 데 기여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간호사들에 대한 인식과 처우를 향상시키는 데 공헌하고 싶습니다.
저는 제 어렸을 적 바람대로 군인이나 경찰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일상 속 영웅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간호사라는 직업을 통해 결국 이루었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아직도 간호사들을 우리 일상 속 영웅이라 부르는 것이 망설여지십니까?
송영관 시카고 일리노이대 간호학 박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