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 바라보는 눈길
공정원 (울산대병원)
개구리들은 나의 발길에 밟힐까봐 그러는지 도망가기 바쁘다. 찬 이슬은 언제나 나의 다리를 적셨고 이슬의 물방울들이 흔들릴 때 마다 나의 맘은 흔들렸지만, 풀숲의 조용함을 뒤흔드는 나는 멋있는 원더우먼처럼 논두렁을 달렸다.
풀숲은 항상 이슬로 가득하다.
쟁기를 맨 소는 느릿느릿 이모부의 구령에 맞추어 걸어 나간다. 코흘리개 남동생은 풀숲에서 풀벌레들과 무슨 이야길 하는지 한참 풀숲을 뒤지고 있고, 언니와 나 그리고 여동생은 쟁기질하는 소를 부지런히 따라다닌다. 양은으로 된 낡은 세숫대야를 다들 머리에 하나씩 이고 돌멩이를 주우러 다니는데 나름 큰 돌멩이는 언니차지다. 키도 크고 힘도 제일 세었으며, 무엇보다도 큰 돌들을 논두렁 밖으로 던지는 것도 무지 잘 한다. 여동생이 울음을 터트린다.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돌멩이 줍는 게 뭐가 그리 하고 싶은지 우리 중에 제일 눈망울이 예쁜 여동생은 자기 세숫대야에 돌이 제일 적다며 울기 시작한다. 이 세상엔 정말이지 희한한 소망을 가슴에 품고 사는 동생도 있나 보다.
자그마한 논은 이렇게 어린 소녀의 소망으로 가득하다.
봄에 쟁기질로 잘 다듬어진 논은 자그만 벼들로 출렁거리며, 가끔씩 내리는 봄비와 따사로운 햇살은 벼들을 자라게 한다. 개구리들은 정말 좋을 것 같다. 논 여기저기에 너무나도 많은 개구리밥이 떠 있다. 논은 개구리밥 천지가 된다. 하교 길에 저 멀리서 먹구름이 밀려오면 우리는 어김없이 뛰어야 하며, 비를 몰고 오는 먹구름의 빠른 속도에 눈이 동그래지고 비를 맞고 나서야 뛰었던 발걸음은 느긋해진다. 헝클어진 머리와 홀딱 젖은 모습을 바라보며 웃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비 온 뒤 개구리의 울음소리는 마을을 가득 채운다.
비 내리는 논두렁은 웃음과 울음소리로 가득하다.
햇볕이 무지 따가워지고 벼가 튼튼해질 무렵이면 태풍은 어김없이 우리에게도 찾아온다. 여동생이 울면서까지 돌멩이를 주워내었고 정성들여 가꾸었던 벼들이지만 이들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태풍을 온몸으로 받는 지붕위의 안테나와 작은 논의 벼들은 태풍에 흔들리며 넘어지기도 한다. 강한 비바람이 그치고 나면 뒷산인 작약산은 무슨 돌멩이들을 그리도 많이 숨겨놓았던지 집 앞 개울가에는 돌멩이가 굴러와 산을 이룬다. 나의 키만큼이나 깊었던 개울가는 이제 무릎밖에 오질 않고 소용돌이치는 물살에 엉덩방아를 찧고 넘어지기도 하지만 우리들은 아주 신이 난다.
그렇게 여름은 가고 있다.
아침은 언제나 고요하다. 간밤 몸부림에 모기장 밖으로 팔이 나와 버렸는지 손가락은 가렵고 오동통하게 부었다. 모기들은 언제나 나만 좋아하는 것 같다. 그리고 나만 또 좋아하는 엄마가 계시다. 논에 참새를 쫓는 일은 내가 제일 잘하나 보다. 왜냐하면 엄마는 항상 그랬듯이 아침이면 나의 두 손에 양은냄비와 숟가락을 쥐어주며 잘 다녀오라고 하시기 때문이다. 눈은 감길 듯 말 듯 하지만 절묘한 걸음걸이로 나는 풀숲을 걷는다. 왜 항상 참새는 아침밥만 먹는 것인가? 어쩌면 낮엔 눈이 부신 것인가? 아님 더위에 지쳐 나뭇가지에 앉아 쉬고 있는 것인가? 저만치 논의 가장자리에 참새들이 소복하게 내려앉는다. “훠이, 훠이.” 나는 손잡이가 한쪽밖에 없는 양은냄비를 신나게 두드리며 뛴다. 가장자리에 내려앉던 참새들은 나의 냄비 두드리는 소리에 놀란 듯 하늘로 다시 날아오르며 도망을 간다. 어쩌면 난 정말 원더우먼이 된 듯하다. 우리 논이 아닌 다른 논으로 가서 앉으면 좋으련만 무심하게도 참새들은 하늘을 날아오른 후 주변을 다시 살피고는 반대편으로 다시 내려앉으려 한다. 나는 다시 양은냄비를 신나게 두드리며 “훠이, 훠이.” 그렇게 논두렁을 뛰어다닌다. 우리 논의 벼들은 내가 지킨다.
참새들은 항상 아침밥만 먹는다.
해가 저만치 솟아오르고 풀숲의 이슬이 빛이 나기 시작할 때 나는 집으로 돌아간다. 어쩌면 엄마는 우리 논의 벼들을 참새로 부터 지킨 나를 위해 맛있는 아침상을 준비해 놓으셨으리라 엄청 기대된다. 밭에서 따온 애호박에 매운 고추를 함께 넣은 호박나물, 커다란 멸치를 우려낸 국물에 된장을 풀고 감자만 넣어도 언제나 맛있는 된장찌개, 고슬고슬하게 지은 흰 쌀밥,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논두렁을 나오면 내 발걸음으로 아홉 보 정도의 작은 개울을 지나는 다리가 하나 있다. 다리를 지나 조금 오르막길을 지나면 밤나무 밭 윤 씨 집을 지난다. 동네 분들이 모두 밤나무 밭 윤 씨 집이라 불렀는데 아마도 밤나무 밭이 무지 많았나 보다.
노란 탱자가 열리는 탱자나무가 윤 씨 집에는 담장처럼 길게 드리워져 있었는데 그 탱자나무는 열 살이던 내 키보다 훨씬 높았다. 참새를 쫓고 집으로 가던 나는 그 길에서 나팔꽃을 보았다. 온 담장이 나팔꽃이었다. 온 탱자나무가 나팔꽃 천지였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활짝 피었는데 꽃잎의 안쪽은 흰색이었으며 꽃잎의 바깥쪽은 진한 자주 빛이었다. 꽃잎마다 이슬이 맺혀 있었고, 동글동글하게 꼬인 넝쿨 줄기는 초록빛이었다.
그때 나팔꽃을 만난 감동은 뭐라 말하기도 어려웠다. 나는 순간 멈추었고 나팔꽃을 바라보았다. 나의 키보다 한참 높게 꽃이 활짝 피었고 하나같이 태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논으로 가던 길에 나는 모두 고스란히 잠들었던 나팔꽃들을 보지 못했고 집으로 가던 길에서야 비로소 나팔꽃을 보았다. 해가 나면서 서서히 피어나는 꽃을 드디어 마주쳤다.
하루의 시작은
알람소리다. 이른 아침 정확하게 5시 50분이면 잠에서 깨어나며 창문을 연다. 눈앞엔 푸른 바다이며 여러 척의 배가 작은 불빛을 내고 있다. 어제 저녁 보았던 배가 그 자리에 있나 싶어 고개를 쑤욱 내밀어 본다. 선선한 바람은 창으로 들어와 집안 곳곳에 스며들며 얼마 전 분홍색과 다홍색의 꽃망울을 터트린 제라늄이 바람에 흔들린다. 나는 아침밥을 짓고 과일을 깎아 접시에 담은 후 식탁을 다시 한 번 깨끗이 닦아 본다. 그리고 씻고 단정하게 머리를 빗는다.
꿈나라인 꼬맹이들이 학교에 늦지 않게 아침밥이라도 조금 먹고 갈려면 깨우고 출근을 해야 한다. 내 아들 딸이 아침 일찍 참새를 쫓으러 가는 것은 아니지만 이른 아침에 기어이 깨우고 나는 서둘러 출근한다. 항상 아침은 분주하다. 어떤 날은 내가 오토바이 순찰대에 경호를 받으며 병원까지 가는 기분이다. 앞에도, 뒤에도 옆에도 모두 오토바이이다. 특히 신호를 받아 대기 중일 때는 더욱 그러하다. 경호를 받으며 도착한 병원은 나의 일터다.
주차장을 나와 1층에서 병원을 향하다가 소란 간호사를 만났다. “선생님! 로터리 돌 때 잘 도셔야 돼요! 안 그럼 큰일 나요!” 병원 앞 응급실과 본관건물 앞에 자그마한 로터리가 생겼는데 무심코 건너다보면 큰일 난다는 것이다. 자세히 보니 두발 짝이면 건너갈듯 한데 그 자리에 하얀색의 횡단보도가 있다. 경비하시는 분이 야단이라는 것이다. 횡단보도를 이용하라고 말이다. 오늘은 손님이 계신지 말씀 중이셔서 우리를 자세히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우리는 천천히 횡단보도를 건넜다.
아침이 열린다.
수술실 입구에 벌써 영양실에서 간식이 도착했다. 핑크빛 모자와 앞치마를 두르신 여사님께서 삶은 계란과 빵을 가득 가지고 오셨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셨다. 갱의실의 신발장 앞에는 실내화가 가득 있다. 나름 자기만의 이니셜을 새기고 잔뜩 멋을 부린 실내화들이다. 가끔씩 실내화가 뒤바뀌는 일이 종종 있긴 하지만 모두들 잘 챙겨 신는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보라색의 상의와 하의를 갈아입고 제한구역으로 향한다. 수술실의 자동문이 열리며 생리식염수와 증류수 그리고 수술용 글러브를 잔뜩 실은 현주 간호사를 만난다.
“아, 선생님! 안녕하세요?”
“그래 안녕”
오른손을 흔들어 보인다. 저 멀리서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승아 간호사다. 오늘은 볼이 덜 빨간지 모르겠다. 조금 추워지면 볼부터 빨개진다. 좀 촌스럽다고나할까! 하지만 귀여운 우리의 마스코트다.
나의 방에 들어가니 신규 혜진 간호사가 있다. 너무나 얌전하다. 일찍 출근하느라 바빴을 터인데 속눈썹을 깔끔하게 말아 올리고 항상 뽀송뽀송한 피부다. 너무 이쁘다. 나를 보고 웃는 미소는 그야말로 모나리자다.
수술실 복도로 향한다. 공급실에서 올라온 물품을 용순 간호사가 3단 카트에 실어서 오는 중이다. “선생님, 선생님 방 물품이 제일 많아요!”라고 활짝 웃는다. 거의 20년을 함께 한 친구 같은 후배이며 나를 위해 항상 기도해 주는 밥 잘 먹는 두 아들의 엄마이다.
나는 수술준비를 마치고 간식을 먹으러 간다. 식당에는 갓 구운 토스트가 있다. 삶은 계란에 딸기잼에 우리 간호사들은 마냥 즐겁다. 어제 먹었던 맛있었던 레스토랑의 파스타 이야기, 친구들과 함께 보았던 영화이야기 그리고 오늘 수술이야기로 이야기꽃을 피운다. 환자의 입실과 함께 모두 수술에 임한다. 거울을 보며 수술용 모자에 머리카락을 단정히 넣고 손 씻기를 하며 심호흡을 할 것이다. 그리고 다짐한다. 우리는 수술실 간호사다.
언뜻 보면 나는 가정과 병원 그리고 수술실에서, 어제 같은 오늘, 오늘 같은 내일을 보낸다. 비슷비슷한 아침이고 날이면 날마다 이마를 마주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문득 나는 나팔꽃이 활짝 폈던 아침을 기억해 내고 우리 집 둘레의 나무와 들판을 다시 기억하고 더듬어 본다. 냉동실 속 각 얼음처럼 하루하루가 같은 모양으로 반복되는 것처럼 보일 때 그럴 때는 고개를 들어 다시 한 번 둘레를 살펴보자. 날마다 만나고 또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리고 이른 아침 이불 속에서 눈을 못 뜨던 통통한 내 아들과 딸이 내가 만났던 그 나팔꽃보다 훨씬 예쁘고 싱그러울지도 모른다. 가슴 철렁하게 했던 나팔꽃보다 몇 배 더 아름답고 소중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