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목욕여행
한명자 보건진료소장
[보건진료소장] 한명자 news@nursenews.co.kr 기사입력 2001-05-20 오전 10:53:53

"할멈! 수건은 챙겼소?"
"영감! 속옷도 가지고 가셔야지요…"
아침부터 온 동네가 부산하다. 마을 어귀엔 어느새 왔는지 낯익은 관광버스가 서있다. 오늘은 다름아닌 한 달에 한번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 목욕 나들이 가는 날이다.
보건진료원이 되어 산골마을 주민들의 건강지킴이를 자청한지도 어느새 10여년이 지났다. 그동안 주민들의 건강증진을 위해 최선을 다해왔지만 마음 한구석에 늘 아쉬움이 남곤 했다.
특히 대중목욕탕이 없어 목욕이라곤 일년내내 여름철에나 마음놓고 하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컸다. 그러던 중 전국 보건진료원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나누는 인터넷 커뮤니티 다음넷(www.daum.net)의 superchp와 충북chp를 통해 다른 보건진료소에서 노인목욕봉사를 성공리에 진행하고 있는 사례를 보고 공동목욕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소전보건진료소의 '할머니, 할아버지 목욕나들이'는 1년전 이렇게 시작됐다. 처음엔 차량문제 등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노인들이 목욕하는 동안 미끄러져 다치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가 가장 컸다. 다행히도 각 동네의 부녀회장으로 구성된 마을건강원들이 자원봉사자로 기꺼이 동행해주어 지금까지 단 한번의 불상사도 일어나지 않았다.
노인들에게 있어 마을을 떠나는 것이 흔치않은 일이기에 공동목욕이 있는 날이면 멀리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마냥 온동네가 부산하다. 목욕탕으로 향하는 버스에 오를때면 팔, 다리, 허리 안 아픈 곳이 없다던 노인들이 막상 차가 출발하기 시작하면 신명나는 음악에 맞춰 어깨춤을 추시곤 한다. 타령에서 구전가요까지 노래들은 또 어찌 그리 잘하시는지... 그렇게 1시간여가 흐르면 목적지인 광천탕에 도착한다.
처음엔 남세스럽다며 주춤거리시던 할머니들이 이제는 자연스럽게 옷을 벗고 탕에 들어가신다. 나는 마을건강원들과 함께 반바지와 티셔츠로 갈아입고 목욕탕 여기저기를 다니며 할머니들의 등을 밀어드리고 미끄러지지 않게 잡아드린다. 때때로 때밀이 아줌마로 오해한 사람들이 부르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기도 한다.
목욕 후에는 여성스런 향기가 물씬 풍기는 향수로 마무리를 해드린다. 처음엔 늙은이한테 향수가 웬말이라던 할머니들이 이젠 그 시간을 기다리는 모습마저 보인다.
한바탕 전쟁같은 목욕이 끝나고 나면 미리 준비한 갓구운 빵과 신선한 우유가 대기하고 있다. 빵과 우유를 드신 후 나른한 몸을 의자에 기대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보고 있으면 '천국이 따로 없구나' 라는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은 행복감을 느낀다.
아름답다는 말 한마디에 마치 어린아이와 같이 기뻐하시는 분들. 이들은 산골마을 건강지킴이로 살아가는 내게 가장 큰 즐거움과 행복을 가져다 준다.
그리고 나는 안다. 이런 상념을 깨고 조금 있으면 목욕나들이의 끝을 알리는 도토리 할머니의 질문이 있을거라는 걸.
"다음엔 또 언제 오는 거유?"
"하하하…"
<충북 청원군 문의면 소전보건진료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