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회 간호문학상 소설 가작
좋은 이별
[편집국] 편집부 news@koreanurse.or.kr 기사입력 2015-12-16 오전 11:19:48
김미영(경기도노인전문 여주병원)
서울, 경기 32도 폭염특보. 내일도 불볕더위가 예상된다고, 날씨에 대한 푸념과 걱정은 tv에서건 라디오 오프닝멘트에서건 빠지질 않았다.
운전석문을 열었을 때, 얼굴로 확 뿜어져오는 열기. 이건 목욕탕 한증막 문을 처음열었을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쓰고 있던 안경에 서리가 끼었다. 한겨울에 맺히는 서리와는 분명 다른, 기분 나쁜 느낌의 서리였다.
한증막에선,그 공기와 하나가 되어, 모래시계를 뒤적뒤적해대며 엉덩이를 들었다 앉았다하면서 15분은 족히 견뎌냈던 나였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여름을 타는 체질로 변하고 있음을 피부로 느낀다. 자리에 앉고나서야, 비로소 선그라스를 챙기지 않음을 알았다.
이미 핸들과 데쉬보드는 손을 못 댈 정도로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누군가 알려준 대로 차 문을 대여섯번씩 열고 닫았다.
역시나, 아스팔트는 반짝반짝 기름칠을 해놓은 것처럼 빛나기 시작했고, 습관적으로 양미간이 찌푸려졌다.
고향집 아니 아빠의 집으로 가는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30분정도 소요. 30분간 태양을 피하며 양미간에 내천자를 그리며 달리는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주기적으로 보톡스를 맞아주지 않는 한, 주름이 깊게 패일지도 모를 일이다.
늘 그랬던 것처럼 CD를 틀었고,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시계바늘”이란 곡이 흘러나왔다.
예전 같으면, 곡이 끝나자마자 다시 그 노래 다시 듣자고 했을 것이고, 난 아예 이 곡만 자동재생되도록 설정해놨을 것이다. 오늘만큼은 엄마의 요구사항이 딱히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젯밤에도 피치 못할 인재가 있었던 모양이다. 아스팔트에 계란후라이 해먹을 날씨라고 엄마가 우스갯소리를 했었는데, 이건 말라비틀어진 털과, 그 형태가 시골길을 무서운지 모르고 쏘다닌 고양이의 형태가 분명하다는 걸. 남겨진 거죽과 털의 배합상태로 짐작할 수 있었다.
대학병원 외래진료를 보러가던 날까지만 하더라도, 이렇게 퀭하고 을씨년스럽지는 않았었다. 이 공간이.
나도 몇 달간 함께 지냈었고, 언니들도 드나들었을것이고, 우리들 눈치못채게 엄마도 분명 가끔씩 들여다보고, 반찬거리를 심심치 않게 날라다주었을 것이다.
페인트칠이 오래전에 벗겨진 길쭉한 쇠 옷걸이엔, 한여름에 입었을뻔한 무릎나온츄리닝바지와 번갈아가며 입었을법한 중간중간 색이 바랜 셔츠 서너개가 초라하게 걸려있었다. 참전용사 로고가 크게 박힌 모자도 걸려있었다.
우리가 병원에 가보자고 했던 그날 오전에도 이 모자를 폼나게 썼을 것이다.
부랴부랴 떠나느라, 싱크대엔 아빠가 남겨둔 미처 씼지못한 양은냄비랑 그릇몇개가 뒤엉켜있었다. 거실바닥은 나뭇결을 따라, 무늬가 있어서인지 얼핏 봐서는 더럽지는 않았고, 손으로 쭈욱 훑어내야먄 뽀얀 먼지가 묻어나는 정도였다.
그러니까 내가, 고향집 아니 아빠집으로 내려온 건 재작년이었다. 유독 스트레스가 심할 때였다. 그즈음 큰언니가 전화를 걸어왔다. 추석연휴 때였나, 언니들한테 더 이상은 병원 못 다니겠노라고. 아예 간호사란 직업을 때려치는게 정신건강에 이로울 거라고 볼멘소리를 해댔던 게 화근이었던 거다.
아니나 다를까, 큰언니의 전화통화는 1시간 장장 이어졌다. 나이차이도 많이 나거니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큰언니였기에, 난 둘째언니나 셋째언니한테 줄곧 내뱉는 버릇없는 말이나, 말대꾸를 하지는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그건 태초부터 그렇게 해야 되는 것이었다.
“저번 추석때, 영은이, 너 핼쑥해 보이기도 하고, 표정도 없는게 스트레스 많아 보이더라. 둘째언니 영채도 니 걱정 하는거같고”
“ 응,, 응 그 정도는 아닌데... ”
“엄마랑 떨어져 사신이후로 아빠도 많이 약해지신거 같고, 기력도 예전 같지 않으신거 같드라. 오랜만에 봐서인지 몰라도, 늙어가는게 보이더라구”
“응,,응. 그러겠지 아마도”
“둘째나 나나, 자주 찾아뵙는다고 마음은 먹어도, 결혼한 여자들이 그게 쉽니? 애 키우랴 또 학교 가서, 꼬맹이들하고 씨름하랴”
“응.”
“그래서 말인데,, 너도 이참에 쉴겸, 아빠 있는 집에 내려가, 아빠랑 같이 지내면 좋을 것 같아서.. 아빠한테 좀 싹싹하게 굴어도 되잖니 이젠 ”
큰 언니의 생각이라지만, 어째 뉘앙스가 둘째 영채언니랑도 얘기가 어느 정도는 된 듯 보였다.
결혼한 언니들 자신들이 자주 찾아뵙지 못하는 죄스러움을 이렇게라도 만회하고 싶은것인지도 모르겠다. 혹시라도 가족이 아닌 누군가에게서 갑자기 들려올 비보에 놀라고 싶지 않아, 노인이 돼버린 이젠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어버린 아빠곁에 젊은이 하나를 놔두고 싶은 심산일지도...
사실, 썩 내키지 않았다.
병원을 그만둔다는 건, 뭐 그런대로 so so 였지만, 유독 나를 못 마땅하게 여겼던 아빠와 한집에서 지낸다는 건 분명 스트레스일 것이다. 병원에서 받은 스트레스에 비하면 덜 할려나..
“영채언니랑 나는 여름, 겨울 방학이 있잖어. 방학때면 형부랑 상의해서, 우리집으로도 모시고 와서 계시게 할테니 니가 쭈욱 거기 있는 다는 생각은 안했으면 한다”
“그리고, 혹시라도 엄마가 묻거들랑, 내 얘긴 하진 말고, 니가 원해서, 좀 쉬고 싶어서 내려온 거라고 둘러대고”
사실, 엄마가 알면 큰일 날 노릇이었다.
혼자 잘 끓여자시고 있을텐데, 뭐하러 직장 잘 다니던 애가 촌에 내려와 수발을 드냐고 말이다.
엄마와 아빠는 강산이 한번정도는 확실하게 변했을법한 열 살차이가 넘는 부부였다.
내 기억으로는, 엄마 아빠가 크게 부부싸움을 한 적은 없는 것 같다. 기억에 없으니, 싸웠어도 그 숫자가 열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였을 테고, 우리가 없을 때 전쟁은 일어났었고 곧 휴전상태로 이어졌으리라.
“저 이는, 집에 쌀이 떨어지니 아니, 지하실에 물이 새니 아니, 사람들하고도 이리저리 어울려야 하는데, 그러지도 못하고”
“또 내가 좀 뭐래면, 꽁해서 한끼라도 거르면 큰일나는 줄 아는 사람이, 며칠을 손하나 까딱 안하고 거르기나 하고, 그렇다고 차려먹을 줄도 모르고”
엄마가 아빠를 타박할 때 하는 말이었다.
난 사실 꼬마였을때는 아빠같은 사람하고 결혼한다고 말하고 다녔었다. 학기마다, 새로 나온 노트와 지우개를 사오고, 아기자기하게 포장된 과자부스러기를 사오는것도 엄마가 아닌 아빠였으니까.
하지만 나도 조금 머리가 큰 다음에서야, 아빤 좋게 말해서 꼼꼼한 사람. 나쁘게 말해선 좀스런 사람이란걸 알게 된 것이다. 아마도 딸들은 엄마편이라고 엄마말에 세뇌당해서 그러했을꺼다.
그래서였을까, 난 사귀어야 할 사람들 중 기피대상이 꽁한 사람 혹은 좀스런 사람이 높은 순위에 들곤 했었다.
중학교, 고등학교 내내 나를 쫓아다니며, 자기 소원은 남북이 통일되는 거랑, 영은이랑 결혼하는 거라고 떠벌리던 고향친구 시경이와의 어이없는 결별도 좀스러 보이는 그의 행동에서였다. 그가 보낸 편지에는 보고싶은..에는... 진한 진달래색 분홍색 글씨였고, 영은이에게는.. 파란색이었다.
A4 한 장의 편지를 읽는 동안, 색색의 펜을 다 사용했을법한 그의 행동이 누군가에는, 자기를 좋아하는 순수한 남정네로 보였겠지만, 나에겐 엄마가 그토록 말해왔던 좀스런 아빠를 상기시키는거 그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또 하나 기피하고 또 기피해서 만나지 말아야할 남자가 있다고 엄마는 신신당부했는데, 그건 즐라도 남자였다.
“엄마가 말이야, 예전에 느이 어렸을 때 월세방을 주고 살았었어, 한 5년 동안. 글쎄, 월셋돈 띠어먹고 가는 여편네들이 다 즐라도 여자들이었어. 처음엔 나한테 을마나 잘 들 하는지. 정신줄 빼놓을 정도로”
확신에 찬 말투면서도,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투로 잠시 나를 헷갈리게도 했었다.
돈 떼먹고 달아난 여편네들과 같은 고향이면 기피해야 남자 순위에 들어야했다. 물론 아빠의 고향은, 이 여편네들하고 같았다.
그러니까 어쨌든 “잘 새겨들어라. 아빠 같은 사람만 아니면 된다”로 해석하면 되는거였다. 하지만, 이런 만류에도 불구하고, 큰 형부와 둘째형부는 모두가 젊은 엄마를 화나게 만들고 떠났던 이 여편네들하고 고향이 같았다. 그 후로 결혼안한 셋째언니와 나에게, 이 여편네들 이야기는 더 이상 화두에 오르지 않았었다.
예고에 없던 함박눈이 부슬부슬 내리던 날로 기억된다. 제작년 12월은.
살림살이가 없다고만 느꼈는데, 짐을 부치고도, 막바지 정리를 하니 수화물 캐리어 2개에도 가득찰 정도였다.
“집 떠나있으면서 고생했다. 잘 다니던 병원을 뭣허러 그만두고 왔냐”
막내를 맞이하는 아빠의 표정은 막 반갑다거나, 따뜻하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큰언니, 둘째언니라면 어깨라도 두들기지 않았을까?
“첫째, 둘째딸이 공부를 잘해서, 김씨는 좋겠어.”
“셋째딸은 미스코리아 내보내도 되겠어”
동네 사람들은 이렇게 얘기했었다.
난 그 당시, 문학동아리에 들어 어울려다녔었다. 유부남하고 김씨네 막내딸이 어울려다닌다는 소문은 한동안 흉흉하게 돌았었다.
내 방이었던, 그리고 다시 내가 주인이 될 이방엔, 가구가 위치했던 곳엔 그대로 가구가 있었고, 전공책 몇 권과 중학교 땐가 고등학교 때 배웠을법한 가사 교과서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옷이라도 만들어 입을 심산이었는지, 예전에 이런걸 왜 다 버리지 않았었나 하는 후회가 잠시 들었다.
몸을 돌돌 말아 웅크려 눕는 내가 이날은 천장를 보고 바로 누웠다. 딸들이 넷이나 됐지만, 집엔 딱히 인테리어를 해주지 않아서였을까. 벽지 중간중간은 뜯어져, 회색의 시멘트가 속살을 부끄러운 듯 드러내고 있었다.
왠지, 언니들의 선택에 이끌려 내려오게 된 고향집에서 좋은 일은 딱히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불길한 예감이었다.
불길한 예감은 지금이 처음은 아니었다. 만나지 말아야 할 기피대상을 피해, 아니 최대한 아빠의 성향과는 거리가 먼 그를 만났었다.
3살 위인, 경민씨를 3년간.
경민씬 즐라도 사람이 아니었고, 아들만 있는 집의 막내였다. 나중에라도 시부모 모실일이 없을 거라고, 숨통이 트일 거라고 엄마와 언니들은 남자 잘 만났다고 했었다.
경민씨는, 셋째언니랑 엄마가 살고 있는 집을 찾아와, 없는 반찬에 밥도 먹고 가고, 아들 없는 우리집에 아들노릇을 했던 사람이었다. 정식 상견례를 하진 않았지만, 이미 엄마와 언니들은 경민씨를 맘에 들어 했고, 제부씨란 말을 서슴지 않게 남발하고 있었다.
“영은아, 너도 나도 나이가 어린것도 아니고, 우리집에선 나보다 널 더 좋아하시는거같드라...”
경민씬, 자기 짝이 될 나에게 늘 이렇게 말했었다.
예정대로라면, 재작년 12월은 고향집으로 내려올게 아니라, 경민씨와 한이불을 덮고 있어야 했다.
엄마는 딸 둘이 교사가 되었고, 빼어나게 이쁜 셋째딸이 있었음에도 별 볼일 없는 아들을 둔 동네 아줌마들 사이에서 어깨를 당당히 펴질 못했다. 아빠는 3대 독자였고, 시부모의 행동은 도를 넘어선 수준이라고 했다.
엄마의 축 쳐진 어깨를 올려줄 사람은 바로 넷째 나였는데,,길흉화복의 열쇠는 내가 쥐고 있었는데.. 엄마의 숨통을 다시 죄는 장본인이 된 거다. 작디작은 피붙이였음에도.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축복받지 못한 존재였다.
“다른 집들은 아들들을 줄줄이도 잘 낳더만,, 우리집은 어째 개새끼가 새끼를 낳아도 어째 다 암컷들이냐구..어? 어?”
몇 달에 한번씩 잊을만하면 듣게 되는, 고지식한 아빠의 유일한 술주정 레파토리였다.
이 말에 엄마는 나름 선택에 선택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50이 넘었고, 폐경이 지났고, 둘째언니가 신혼여행을 마치고 온 며칠이 지나서였을까? 엄마는 결혼안한 셋째언니네로 옷가지 몇 개를 들고, 나가버렸었다. 황혼이혼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 특단의 조치를 취한 과감한 엄마의 행동이었다. 엄마 딴에도, 다시는 돌아보지는 않을 거라 여겼을 꺼다. 잔소리나 일삼는 할아버지냄새 풍기는 남편을...
꽃가루 날리고, 황사가 심해진 봄날씨라 그런지, 건넌방에서 주무시는 아빠의 기침소리가 내 방까지 리듬을 타고 전해졌다. 담배도 피지 않는 아빠가, 화장실에서 캐액 소리를 내며 뱉어내는 가래소리는 정말이지 듣기 싫었다. 일부러 그러시나 싶을 정도로. 엄마가 집을 나가, 언니네 집을 투어하고 있는건 누가 뭐래도 아빠 때문이었다. 아빠도 아마 부정은 못할 것이다.
“폐암 4기입니다. 보통 폐암은 증상이 나타나면 이미...”
이미 숱한 보호자들에게 같은 멘트로, 상태를 설명했을법한 교수는, 일말의 동요도 없는 담담한 말투였다. 엄마한테 굳이 알려서 좋을거 없다고 했다. 언니들은.
“누구든지, 지 손으로 못 떠먹고, 지 발로 못 걸으면 가야되는거다”는 게 엄마의 말이었으니.
여름방학 때 자기 집으로 모시겠다는 큰언니의 말은 지켜지지 않을 것이다.
경민씨와는 이 와중에도 연락이 되질 않았다. 보낸 메시지에 1이란 숫자가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딸 넷 중, 유독 입이 잰 셋째언니가 주범이었을까. 그 새를 못 참고, 아빠의 병명을 엄마에게 알렸다.
4기이니, 더 나빠지기 전에 가족들과 함께 여행도 다니고, 시간을 좀 더 보내자는 언니와 형부들의 말에, 강하게 반대를 한건 의외의 인물. 다름 아닌 엄마였다. 해 볼 때까지 다 해달라고. 이 대학병원에서 가장 좋은 약이 있으면 다 써달라고 했으니...
“아무래도, 일반병실에 계시기보다는 전담간호사가 있는, 집중치료실로 옮기시는 게 나을듯합니다”
턱 성형이라도 한 듯, 턱이 유독 뾰족한 주치의는 이제 중환자실 회진시간에 뵙자는 말을 남기고 나가버렸다.
중환자실 전광판엔 기존에 있던 이름이 순식간에 사라지기도 했고, 못보던 이름이 나타나 새롭게 자리잡기도 했다. 이름이 사라지는 건 두가지였다. 일반병실로 올라가거나, 아님 하늘로 올라가거나. 예상대로라면 아빠는 후자일 것이다.
이름이 바뀔 때마다, 보따리를 챙겨 부랴부랴 이동을 하는 사람도 있었고, 새로이 보따리를 싸들고 와 어색하게 자리를 맡는 사람도 있었다. 보호자 대기실에도 엄연히 명당자리는 존재하므로...
“내과 중환자실, 코드블루, 내과 중환자실 코드블루”
7층 휴게소에서, 음료를 마시며 쉬고 있을 때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암환자를 남편으로 둔 한 할머니의 얘기를 들어주던 참이었다. 아빠가 계신 곳은 2층 내과 중환자실이었다.
“아직은 아니야, 아직은 안돼”
아빠한테 일이 생긴게 분명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려서도 안되고, 타서도 안되었다. 계단으로 뛰었다.
아빠가 계신 6구역주변엔 흰 가운을 입은 의사들이 둘러싸고 있었고, 신규간호사는 의사의 오더에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자세 못 잡고 서있는 emergency cart와, syringe 껍데기만 바닥에 헝크러이 보일뿐, 덩치 좋은 젊은 의사들의 등에 가려져 환자의 얼굴은 보이질 않았다. 의사들 틈으로 들어가, 얼굴을 확인했다. 아빠가 아니기를. 언젠가 떠날 아빠지만, 지금이서는 안된다.
메토밀이란 농약을 먹고 들어온 옆환자에게 닥친 심정지였다.
신규간호사가 아빠의 tube feeding을 막 마쳤다.
“할아버지, 지금 식사 들어갔으니깐, 한 30분가량은 좀 힘드셔도 앉아계셔요.. 옆에 따님도 있으니까 얘기도 좀 하시구요”
신규간호사는 어디서건 매뉴얼대로 하는 법이다. 내가 그랬던 거처럼.
“영은아, 집에 가면 아빠방 서랍 속 함 열어봐라”
“네.. 근데 왜요? ”
“니 언니들이, 용돈준거 몇푼 남아있을거다.”
“네.. 근데 아빠 말이,.. 좀,, 왜 그래? ”
예감 안 좋은 이 말을 듣기에는 아직 이르지 않나싶었다.
엄마는 걸려있던 셔츠와 바지. 그리고 모자. 아빠의 물건은 모조리 치우라고 했다. 한번도 안신은 큰언니가 사준 구두까지도. 옛날 과자종합선물세트 곽같은게 나왔다. 서랍 속에서.
그 안엔 내가 문예반 활동을 하며, 연필로 꾹꾹 눌러쓴, 색 바랜 누런 원고지가 차곡차곡 들어있었고, 첫월급을 받아 아빠께 드린 돈봉투도 색이 바랜 채 들어있었다. 어버이날이라고 의례적으로 쓰게 했던, 부모님께 썼던 편지도 함께 있었다. 부모님께 효도하겠다는 말이 유독 굵은 글씨체가 되어 눈에 들어왔다.
경민씨와는 여태 연락이 안 되고 있다. 보낸 메시지 앞머리에는 여전히 1이란 숫자가 변하지 않고 있었다. 앞으로도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와의 이별은 아프고도 나쁜 이별이었다. 30년가량을 데면데면 지내온 아빠와는 분명 좋은 이별이었다. 이거면 족했다.
서울, 경기 32도 폭염특보. 내일도 불볕더위가 예상된다고, 날씨에 대한 푸념과 걱정은 tv에서건 라디오 오프닝멘트에서건 빠지질 않았다.
운전석문을 열었을 때, 얼굴로 확 뿜어져오는 열기. 이건 목욕탕 한증막 문을 처음열었을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쓰고 있던 안경에 서리가 끼었다. 한겨울에 맺히는 서리와는 분명 다른, 기분 나쁜 느낌의 서리였다.
한증막에선,그 공기와 하나가 되어, 모래시계를 뒤적뒤적해대며 엉덩이를 들었다 앉았다하면서 15분은 족히 견뎌냈던 나였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여름을 타는 체질로 변하고 있음을 피부로 느낀다. 자리에 앉고나서야, 비로소 선그라스를 챙기지 않음을 알았다.
이미 핸들과 데쉬보드는 손을 못 댈 정도로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누군가 알려준 대로 차 문을 대여섯번씩 열고 닫았다.
역시나, 아스팔트는 반짝반짝 기름칠을 해놓은 것처럼 빛나기 시작했고, 습관적으로 양미간이 찌푸려졌다.
고향집 아니 아빠의 집으로 가는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30분정도 소요. 30분간 태양을 피하며 양미간에 내천자를 그리며 달리는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주기적으로 보톡스를 맞아주지 않는 한, 주름이 깊게 패일지도 모를 일이다.
늘 그랬던 것처럼 CD를 틀었고,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시계바늘”이란 곡이 흘러나왔다.
예전 같으면, 곡이 끝나자마자 다시 그 노래 다시 듣자고 했을 것이고, 난 아예 이 곡만 자동재생되도록 설정해놨을 것이다. 오늘만큼은 엄마의 요구사항이 딱히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젯밤에도 피치 못할 인재가 있었던 모양이다. 아스팔트에 계란후라이 해먹을 날씨라고 엄마가 우스갯소리를 했었는데, 이건 말라비틀어진 털과, 그 형태가 시골길을 무서운지 모르고 쏘다닌 고양이의 형태가 분명하다는 걸. 남겨진 거죽과 털의 배합상태로 짐작할 수 있었다.
대학병원 외래진료를 보러가던 날까지만 하더라도, 이렇게 퀭하고 을씨년스럽지는 않았었다. 이 공간이.
나도 몇 달간 함께 지냈었고, 언니들도 드나들었을것이고, 우리들 눈치못채게 엄마도 분명 가끔씩 들여다보고, 반찬거리를 심심치 않게 날라다주었을 것이다.
페인트칠이 오래전에 벗겨진 길쭉한 쇠 옷걸이엔, 한여름에 입었을뻔한 무릎나온츄리닝바지와 번갈아가며 입었을법한 중간중간 색이 바랜 셔츠 서너개가 초라하게 걸려있었다. 참전용사 로고가 크게 박힌 모자도 걸려있었다.
우리가 병원에 가보자고 했던 그날 오전에도 이 모자를 폼나게 썼을 것이다.
부랴부랴 떠나느라, 싱크대엔 아빠가 남겨둔 미처 씼지못한 양은냄비랑 그릇몇개가 뒤엉켜있었다. 거실바닥은 나뭇결을 따라, 무늬가 있어서인지 얼핏 봐서는 더럽지는 않았고, 손으로 쭈욱 훑어내야먄 뽀얀 먼지가 묻어나는 정도였다.
그러니까 내가, 고향집 아니 아빠집으로 내려온 건 재작년이었다. 유독 스트레스가 심할 때였다. 그즈음 큰언니가 전화를 걸어왔다. 추석연휴 때였나, 언니들한테 더 이상은 병원 못 다니겠노라고. 아예 간호사란 직업을 때려치는게 정신건강에 이로울 거라고 볼멘소리를 해댔던 게 화근이었던 거다.
아니나 다를까, 큰언니의 전화통화는 1시간 장장 이어졌다. 나이차이도 많이 나거니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큰언니였기에, 난 둘째언니나 셋째언니한테 줄곧 내뱉는 버릇없는 말이나, 말대꾸를 하지는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그건 태초부터 그렇게 해야 되는 것이었다.
“저번 추석때, 영은이, 너 핼쑥해 보이기도 하고, 표정도 없는게 스트레스 많아 보이더라. 둘째언니 영채도 니 걱정 하는거같고”
“ 응,, 응 그 정도는 아닌데... ”
“엄마랑 떨어져 사신이후로 아빠도 많이 약해지신거 같고, 기력도 예전 같지 않으신거 같드라. 오랜만에 봐서인지 몰라도, 늙어가는게 보이더라구”
“응,,응. 그러겠지 아마도”
“둘째나 나나, 자주 찾아뵙는다고 마음은 먹어도, 결혼한 여자들이 그게 쉽니? 애 키우랴 또 학교 가서, 꼬맹이들하고 씨름하랴”
“응.”
“그래서 말인데,, 너도 이참에 쉴겸, 아빠 있는 집에 내려가, 아빠랑 같이 지내면 좋을 것 같아서.. 아빠한테 좀 싹싹하게 굴어도 되잖니 이젠 ”
큰 언니의 생각이라지만, 어째 뉘앙스가 둘째 영채언니랑도 얘기가 어느 정도는 된 듯 보였다.
결혼한 언니들 자신들이 자주 찾아뵙지 못하는 죄스러움을 이렇게라도 만회하고 싶은것인지도 모르겠다. 혹시라도 가족이 아닌 누군가에게서 갑자기 들려올 비보에 놀라고 싶지 않아, 노인이 돼버린 이젠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어버린 아빠곁에 젊은이 하나를 놔두고 싶은 심산일지도...
사실, 썩 내키지 않았다.
병원을 그만둔다는 건, 뭐 그런대로 so so 였지만, 유독 나를 못 마땅하게 여겼던 아빠와 한집에서 지낸다는 건 분명 스트레스일 것이다. 병원에서 받은 스트레스에 비하면 덜 할려나..
“영채언니랑 나는 여름, 겨울 방학이 있잖어. 방학때면 형부랑 상의해서, 우리집으로도 모시고 와서 계시게 할테니 니가 쭈욱 거기 있는 다는 생각은 안했으면 한다”
“그리고, 혹시라도 엄마가 묻거들랑, 내 얘긴 하진 말고, 니가 원해서, 좀 쉬고 싶어서 내려온 거라고 둘러대고”
사실, 엄마가 알면 큰일 날 노릇이었다.
혼자 잘 끓여자시고 있을텐데, 뭐하러 직장 잘 다니던 애가 촌에 내려와 수발을 드냐고 말이다.
엄마와 아빠는 강산이 한번정도는 확실하게 변했을법한 열 살차이가 넘는 부부였다.
내 기억으로는, 엄마 아빠가 크게 부부싸움을 한 적은 없는 것 같다. 기억에 없으니, 싸웠어도 그 숫자가 열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였을 테고, 우리가 없을 때 전쟁은 일어났었고 곧 휴전상태로 이어졌으리라.
“저 이는, 집에 쌀이 떨어지니 아니, 지하실에 물이 새니 아니, 사람들하고도 이리저리 어울려야 하는데, 그러지도 못하고”
“또 내가 좀 뭐래면, 꽁해서 한끼라도 거르면 큰일나는 줄 아는 사람이, 며칠을 손하나 까딱 안하고 거르기나 하고, 그렇다고 차려먹을 줄도 모르고”
엄마가 아빠를 타박할 때 하는 말이었다.
난 사실 꼬마였을때는 아빠같은 사람하고 결혼한다고 말하고 다녔었다. 학기마다, 새로 나온 노트와 지우개를 사오고, 아기자기하게 포장된 과자부스러기를 사오는것도 엄마가 아닌 아빠였으니까.
하지만 나도 조금 머리가 큰 다음에서야, 아빤 좋게 말해서 꼼꼼한 사람. 나쁘게 말해선 좀스런 사람이란걸 알게 된 것이다. 아마도 딸들은 엄마편이라고 엄마말에 세뇌당해서 그러했을꺼다.
그래서였을까, 난 사귀어야 할 사람들 중 기피대상이 꽁한 사람 혹은 좀스런 사람이 높은 순위에 들곤 했었다.
중학교, 고등학교 내내 나를 쫓아다니며, 자기 소원은 남북이 통일되는 거랑, 영은이랑 결혼하는 거라고 떠벌리던 고향친구 시경이와의 어이없는 결별도 좀스러 보이는 그의 행동에서였다. 그가 보낸 편지에는 보고싶은..에는... 진한 진달래색 분홍색 글씨였고, 영은이에게는.. 파란색이었다.
A4 한 장의 편지를 읽는 동안, 색색의 펜을 다 사용했을법한 그의 행동이 누군가에는, 자기를 좋아하는 순수한 남정네로 보였겠지만, 나에겐 엄마가 그토록 말해왔던 좀스런 아빠를 상기시키는거 그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또 하나 기피하고 또 기피해서 만나지 말아야할 남자가 있다고 엄마는 신신당부했는데, 그건 즐라도 남자였다.
“엄마가 말이야, 예전에 느이 어렸을 때 월세방을 주고 살았었어, 한 5년 동안. 글쎄, 월셋돈 띠어먹고 가는 여편네들이 다 즐라도 여자들이었어. 처음엔 나한테 을마나 잘 들 하는지. 정신줄 빼놓을 정도로”
확신에 찬 말투면서도,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투로 잠시 나를 헷갈리게도 했었다.
돈 떼먹고 달아난 여편네들과 같은 고향이면 기피해야 남자 순위에 들어야했다. 물론 아빠의 고향은, 이 여편네들하고 같았다.
그러니까 어쨌든 “잘 새겨들어라. 아빠 같은 사람만 아니면 된다”로 해석하면 되는거였다. 하지만, 이런 만류에도 불구하고, 큰 형부와 둘째형부는 모두가 젊은 엄마를 화나게 만들고 떠났던 이 여편네들하고 고향이 같았다. 그 후로 결혼안한 셋째언니와 나에게, 이 여편네들 이야기는 더 이상 화두에 오르지 않았었다.
예고에 없던 함박눈이 부슬부슬 내리던 날로 기억된다. 제작년 12월은.
살림살이가 없다고만 느꼈는데, 짐을 부치고도, 막바지 정리를 하니 수화물 캐리어 2개에도 가득찰 정도였다.
“집 떠나있으면서 고생했다. 잘 다니던 병원을 뭣허러 그만두고 왔냐”
막내를 맞이하는 아빠의 표정은 막 반갑다거나, 따뜻하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큰언니, 둘째언니라면 어깨라도 두들기지 않았을까?
“첫째, 둘째딸이 공부를 잘해서, 김씨는 좋겠어.”
“셋째딸은 미스코리아 내보내도 되겠어”
동네 사람들은 이렇게 얘기했었다.
난 그 당시, 문학동아리에 들어 어울려다녔었다. 유부남하고 김씨네 막내딸이 어울려다닌다는 소문은 한동안 흉흉하게 돌았었다.
내 방이었던, 그리고 다시 내가 주인이 될 이방엔, 가구가 위치했던 곳엔 그대로 가구가 있었고, 전공책 몇 권과 중학교 땐가 고등학교 때 배웠을법한 가사 교과서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옷이라도 만들어 입을 심산이었는지, 예전에 이런걸 왜 다 버리지 않았었나 하는 후회가 잠시 들었다.
몸을 돌돌 말아 웅크려 눕는 내가 이날은 천장를 보고 바로 누웠다. 딸들이 넷이나 됐지만, 집엔 딱히 인테리어를 해주지 않아서였을까. 벽지 중간중간은 뜯어져, 회색의 시멘트가 속살을 부끄러운 듯 드러내고 있었다.
왠지, 언니들의 선택에 이끌려 내려오게 된 고향집에서 좋은 일은 딱히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불길한 예감이었다.
불길한 예감은 지금이 처음은 아니었다. 만나지 말아야 할 기피대상을 피해, 아니 최대한 아빠의 성향과는 거리가 먼 그를 만났었다.
3살 위인, 경민씨를 3년간.
경민씬 즐라도 사람이 아니었고, 아들만 있는 집의 막내였다. 나중에라도 시부모 모실일이 없을 거라고, 숨통이 트일 거라고 엄마와 언니들은 남자 잘 만났다고 했었다.
경민씨는, 셋째언니랑 엄마가 살고 있는 집을 찾아와, 없는 반찬에 밥도 먹고 가고, 아들 없는 우리집에 아들노릇을 했던 사람이었다. 정식 상견례를 하진 않았지만, 이미 엄마와 언니들은 경민씨를 맘에 들어 했고, 제부씨란 말을 서슴지 않게 남발하고 있었다.
“영은아, 너도 나도 나이가 어린것도 아니고, 우리집에선 나보다 널 더 좋아하시는거같드라...”
경민씬, 자기 짝이 될 나에게 늘 이렇게 말했었다.
예정대로라면, 재작년 12월은 고향집으로 내려올게 아니라, 경민씨와 한이불을 덮고 있어야 했다.
엄마는 딸 둘이 교사가 되었고, 빼어나게 이쁜 셋째딸이 있었음에도 별 볼일 없는 아들을 둔 동네 아줌마들 사이에서 어깨를 당당히 펴질 못했다. 아빠는 3대 독자였고, 시부모의 행동은 도를 넘어선 수준이라고 했다.
엄마의 축 쳐진 어깨를 올려줄 사람은 바로 넷째 나였는데,,길흉화복의 열쇠는 내가 쥐고 있었는데.. 엄마의 숨통을 다시 죄는 장본인이 된 거다. 작디작은 피붙이였음에도.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축복받지 못한 존재였다.
“다른 집들은 아들들을 줄줄이도 잘 낳더만,, 우리집은 어째 개새끼가 새끼를 낳아도 어째 다 암컷들이냐구..어? 어?”
몇 달에 한번씩 잊을만하면 듣게 되는, 고지식한 아빠의 유일한 술주정 레파토리였다.
이 말에 엄마는 나름 선택에 선택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50이 넘었고, 폐경이 지났고, 둘째언니가 신혼여행을 마치고 온 며칠이 지나서였을까? 엄마는 결혼안한 셋째언니네로 옷가지 몇 개를 들고, 나가버렸었다. 황혼이혼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 특단의 조치를 취한 과감한 엄마의 행동이었다. 엄마 딴에도, 다시는 돌아보지는 않을 거라 여겼을 꺼다. 잔소리나 일삼는 할아버지냄새 풍기는 남편을...
꽃가루 날리고, 황사가 심해진 봄날씨라 그런지, 건넌방에서 주무시는 아빠의 기침소리가 내 방까지 리듬을 타고 전해졌다. 담배도 피지 않는 아빠가, 화장실에서 캐액 소리를 내며 뱉어내는 가래소리는 정말이지 듣기 싫었다. 일부러 그러시나 싶을 정도로. 엄마가 집을 나가, 언니네 집을 투어하고 있는건 누가 뭐래도 아빠 때문이었다. 아빠도 아마 부정은 못할 것이다.
“폐암 4기입니다. 보통 폐암은 증상이 나타나면 이미...”
이미 숱한 보호자들에게 같은 멘트로, 상태를 설명했을법한 교수는, 일말의 동요도 없는 담담한 말투였다. 엄마한테 굳이 알려서 좋을거 없다고 했다. 언니들은.
“누구든지, 지 손으로 못 떠먹고, 지 발로 못 걸으면 가야되는거다”는 게 엄마의 말이었으니.
여름방학 때 자기 집으로 모시겠다는 큰언니의 말은 지켜지지 않을 것이다.
경민씨와는 이 와중에도 연락이 되질 않았다. 보낸 메시지에 1이란 숫자가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딸 넷 중, 유독 입이 잰 셋째언니가 주범이었을까. 그 새를 못 참고, 아빠의 병명을 엄마에게 알렸다.
4기이니, 더 나빠지기 전에 가족들과 함께 여행도 다니고, 시간을 좀 더 보내자는 언니와 형부들의 말에, 강하게 반대를 한건 의외의 인물. 다름 아닌 엄마였다. 해 볼 때까지 다 해달라고. 이 대학병원에서 가장 좋은 약이 있으면 다 써달라고 했으니...
“아무래도, 일반병실에 계시기보다는 전담간호사가 있는, 집중치료실로 옮기시는 게 나을듯합니다”
턱 성형이라도 한 듯, 턱이 유독 뾰족한 주치의는 이제 중환자실 회진시간에 뵙자는 말을 남기고 나가버렸다.
중환자실 전광판엔 기존에 있던 이름이 순식간에 사라지기도 했고, 못보던 이름이 나타나 새롭게 자리잡기도 했다. 이름이 사라지는 건 두가지였다. 일반병실로 올라가거나, 아님 하늘로 올라가거나. 예상대로라면 아빠는 후자일 것이다.
이름이 바뀔 때마다, 보따리를 챙겨 부랴부랴 이동을 하는 사람도 있었고, 새로이 보따리를 싸들고 와 어색하게 자리를 맡는 사람도 있었다. 보호자 대기실에도 엄연히 명당자리는 존재하므로...
“내과 중환자실, 코드블루, 내과 중환자실 코드블루”
7층 휴게소에서, 음료를 마시며 쉬고 있을 때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암환자를 남편으로 둔 한 할머니의 얘기를 들어주던 참이었다. 아빠가 계신 곳은 2층 내과 중환자실이었다.
“아직은 아니야, 아직은 안돼”
아빠한테 일이 생긴게 분명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려서도 안되고, 타서도 안되었다. 계단으로 뛰었다.
아빠가 계신 6구역주변엔 흰 가운을 입은 의사들이 둘러싸고 있었고, 신규간호사는 의사의 오더에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자세 못 잡고 서있는 emergency cart와, syringe 껍데기만 바닥에 헝크러이 보일뿐, 덩치 좋은 젊은 의사들의 등에 가려져 환자의 얼굴은 보이질 않았다. 의사들 틈으로 들어가, 얼굴을 확인했다. 아빠가 아니기를. 언젠가 떠날 아빠지만, 지금이서는 안된다.
메토밀이란 농약을 먹고 들어온 옆환자에게 닥친 심정지였다.
신규간호사가 아빠의 tube feeding을 막 마쳤다.
“할아버지, 지금 식사 들어갔으니깐, 한 30분가량은 좀 힘드셔도 앉아계셔요.. 옆에 따님도 있으니까 얘기도 좀 하시구요”
신규간호사는 어디서건 매뉴얼대로 하는 법이다. 내가 그랬던 거처럼.
“영은아, 집에 가면 아빠방 서랍 속 함 열어봐라”
“네.. 근데 왜요? ”
“니 언니들이, 용돈준거 몇푼 남아있을거다.”
“네.. 근데 아빠 말이,.. 좀,, 왜 그래? ”
예감 안 좋은 이 말을 듣기에는 아직 이르지 않나싶었다.
엄마는 걸려있던 셔츠와 바지. 그리고 모자. 아빠의 물건은 모조리 치우라고 했다. 한번도 안신은 큰언니가 사준 구두까지도. 옛날 과자종합선물세트 곽같은게 나왔다. 서랍 속에서.
그 안엔 내가 문예반 활동을 하며, 연필로 꾹꾹 눌러쓴, 색 바랜 누런 원고지가 차곡차곡 들어있었고, 첫월급을 받아 아빠께 드린 돈봉투도 색이 바랜 채 들어있었다. 어버이날이라고 의례적으로 쓰게 했던, 부모님께 썼던 편지도 함께 있었다. 부모님께 효도하겠다는 말이 유독 굵은 글씨체가 되어 눈에 들어왔다.
경민씨와는 여태 연락이 안 되고 있다. 보낸 메시지 앞머리에는 여전히 1이란 숫자가 변하지 않고 있었다. 앞으로도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와의 이별은 아프고도 나쁜 이별이었다. 30년가량을 데면데면 지내온 아빠와는 분명 좋은 이별이었다. 이거면 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