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회 간호문학상 수기 가작
도전, 그리고 새로운 시작
[편집국] 편집부 news@koreanurse.or.kr 기사입력 2012-12-20 오후 14:36:21
- 김태용(극동대 3학년)
현재 간호학과에 재학중인 나는 처음부터 간호학에 발을 들여 놓지 않았다. 나는 체대생이었기 때문이다 체대생이 어떻게 간호학과에 다니고 있을까?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닌가? 나는 이 아이러니한 일을 모든이에게 들려주려 한다.
당시 고등학교에 재학중인 나는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던 찰나 직업이 간호사인 고모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용아 너는 섬세하고 꼼꼼해서 간호사가 어울리는 것 같다 어떻게 생각하니?” 나는 고모의 말을 웃어 넘겼다 그렇다 남자간호사가 웬말인가 간호사는 여성들의 직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간호학과는 취업률이 높아 성적이 높아야만 갈 수 있는 그저 동경의 대상이였다.
성숙의 장
나의 20살로 돌아가자면 평소 운동을 매우 좋아했던 나는 체육선생님이라는 목표가 생겼다 시간이 흘러 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렇다. 현실은 체육학과였다. 오직 체육선생님이 되겠다는 목표 하나만으로 나는 학업에 임했다. 노력한 만큼 성적도 나와 꿈에 다가설 수 있었다.
당시 다른것에는 관심이 없던 나에게 새로운 관심거리가 생겨났다. 그것은 바로 해외봉사였다. 때마침 학교에서 해외봉사단을 선발 하던터라 나는 망설임 없이 지원하게 되었고 1차 서류전형을 통과하고 2차 최종면접까지 치르고 난 후 당당히 합격하였다. 총 30명을 뽑았는데 20살 신입생은 나 혼자였다. 다들 3.4학년 선배들이였다. 그때 들었던 첫 생각은 ‘내가 막내니까 귀여움을 받겠구나’ 라고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그랬을지 몰라도 내적으로는 많이 힘들었다.
6개월 동안 프로그램을 준비하면서 형, 누나들에겐 배울 것이 정말 많았다. 같이 생활하다 보니 막내인 나는 사소한 것 일지라도 30명 봉사단원의 장점을 하나하나 보고 배울 수 있게 되었다. 캄보디아에서 작은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나는 막내라는 이유로 일을 잘 찾아서 하지 못해 형들에게 많이 혼이 났다. 나는 정말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형들 눈에는 그리 보이지 않았나보다. 나는 어린마음에 울컥함과 동시에 나의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혼자 버스 뒤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던 중 리더형이 나에게 이런말을 해주었다. “태용아 많이 서러웠겠구나. 나는 좋은 리더가 아닌 것 같다. 지금 네가 이렇게 힘들어 하고 있잖아. 하지만 네가 리더가 되었을땐 정말 좋은 리더가 될거야. 막내의 자리에서 이런 경험을 해보았으니 넌 리더로써 약자들의 마음까지도 헤아려 줄 수 있을거야. 이번 계기가 너에게 좋은 약이 될거야” 정말이지 너무 고맙게 생각한다. 이렇게 하루하루 어린 나 자신은 성숙해져가고 있었다.
해외봉사 도중 나는 캄보디아에서 에이즈병원에 가보았다. 처음에는 거부감이 먼저 들었다. 에이즈라는 병이 무서웠고 내가 왜 저기에 가야하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병원에 간 이후 나는 그런 생각을 한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에이즈에 걸린 꼬마아이들은 약기운 때문인지 하루종일 무기력해 보였다. 말없이 다가와 손을 내미는 아이의 손을 꽉 잡아주기도 하고 안아주기도 했다.
그러던 중 한 아이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이제 죽어요. 하지만 나는 지금 너무 행복해요. 지금 여기서 밥을 먹을 수 있어서 좋고 친구들과 같이 공부를 할 수 있어서 좋아요” 그 아이는 웃고 있었다. 정말일까? 자신이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는게 가능할까? 그런 아이를 보고 나는 내 자신이 정말 부끄러웠다 이후 나는 하루하루를 더 열심히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간호사라는 목표의 길 위에 한 발짝 걸음을 내딛다
정말 내가 간호학과를 원하게 된 계기는 나의 취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나에게는 특별한 취미가 있다. 다큐멘터리를 챙겨보는 것이다. 내가 다큐멘터리를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경험과 공감이다. 주변에서 쉽게 볼 수없는 것들을 볼 수 있다. 또 가난한 사람의 입장도 되어 보고 성공한 사람의 입장도 되어 볼 수 있다.
나는 특히 생명을 다루는 다큐멘터리에 관심이 많았다. MBC에서 휴먼다큐 사랑이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한 적이 있다. 이걸 본 후 나는 간호사라는 직업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서연이라는 아이가 소개 되었는데 장기 곳곳에서 다발적으로 원인모를 출혈이 생기는 불치병을 앓고 있었다. 어린 아이가 씩씩하게 병마와 싸우는 모습을 보고 대견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였다.
이 프로그램을 보고 나는 이런 어린 환자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현대의학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병을 앓고 있는 이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이때 들었던 생각이 바로 ‘간호’이다. 24시간 환자를 지켜보며 변화에 즉각적으로 대처하고 보살필 수 있는 직업은 바로 간호사이다.
나는 이런 어린 환자들에게 작지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파 5월 5일 어린이날을 기념해 백혈병을 앓고 있는 그 어떤 어린 환자에게 선물을 주기로 결심했다. 바로 조혈모세포기증을 신청했다. 하루빨리 나의 어린이날 선물을 받아가는 어린 환자가 나타났으면 하는 바램이다. 이로 인해 나는 간호사라는 꿈에 대한 열망이 더욱 더 뜨겁게 느껴졌다.
간호사라는 목표의 길 위에서 출발 소리와 함께 나의 마라톤은 시작되었다.
이후 간호사가 되기로 결심한 나는 간호학과에 진학하는 것이 당장의 목표가 되었다. 당시 나는 학과에서 괜찮은 성적을 유지하여 덕분에 교직이수도 할 수 있었고 교수님들의 기대도 컸다. 동시에 해병대예비장교후보생에 선발되어 내가 가야 할 길이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 모든 것들을 포기해야 했다. 이 모든 것을 포기할만한 가치 있는 도전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간호학과로 편입을 하기 위해 그때부터 나는 간호학과에 재학중인 여자친구의 도움을 받아 간호학에 대한 공부도 하게 되었다. 같이 도서관을 다니면서도 느꼈지만 간호학과 학생들은 존경스럽다. 토익, 전공, 봉사활동, 자격증 등 학업에 열중하는 모습이 얼마나 멋있는가. 더군다나 전공서적도 두껍고 멋있는 의학용어가 가득했다. 그렇다 간호학과는 공부를 잘해야 오는 학과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더 멋있어 보였다.(머지않아 이러한 동경이 시련과 고난으로 다가올 줄은 꿈에도 모른채......^^)
어느덧 편입원서를 넣고 면접장에 내 자신이 앉아 있었다. 다수의 교수님들께선 나를 꽤나 흥미로운 녀석으로 보았다. 체대생이 간호학과에? 교수님들께서도 이런 경우는 처음인듯 싶었다. 나는 자신이 있었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줄줄이 불합격 소식을 듣고 있었다.
마침내 나는 성공했다. 현재 다니고 있는 학교와 대구한의대 간호학과에 합격 하였다. 현재 다니고 있는 학교는 2명을 모집하였고 대구한의대는 1명을 모집하였다. 대구한의대에서 같이 면접을 본 학생이 어찌나 말을 잘하던지 결과는 내가 합격이고 그 친구는 예비1번이었다. 현재 다니고 있는 학교를 최초합격을 해놓은 상태인 나는 더 좋은 환경의 학교에 끌렸던건 사실이지만 한 사람의 꿈을 짓밟을 수 없었다. 그 친구는 선택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친구 또한 나와 같이 어떠한 계기를 통해 간호사가 되기로 결심을 했을텐데 나의 꿈이 소중하듯이 그 학생의 꿈 또한 소중할 것이라 생각하여 양보를 해주게 되었다. 마침내 나는 그 학교의 합격포기를 선택하였다. 현재 재학중인 학교 후배들이 나에게 이런말을 한다. “저 같으면 거기 갈 것 같아요 왜 그러셨어요?” 나는 웃어 넘기며 대답한다.
마라톤 도중 찾아온 고통과 갈증
마침내 간호학과에 입학하게 된 나는 지금 새로운 도전중이다. 남중, 남고, 체대를 다니던 남학생이 간호학과에 다니고 있다. 적응은 할 수 있을까. 걱정 했지만 잘 적응해 나가고 있다. 더 큰 문제는 학업에 대한 문제였다. 문과를 나오고 체대를 다니던 내가 이과계열인 간호학을 배우려니 문제가 많았다. 수업을 들으며 용매, 용질 조차도 모르는 나는 하루하루 뒤처지기 일쑤였다. 정말이지 너무 힘이 든다.
임상에 나가 계신 모든 간호사선생님들이 존경스럽게 느껴진다. 이러한 과정을 어떻게 다 견디셨을까 남들보다 덜 자고 덜 놀고 더 열심히 해야한다. 대학에 입학한 순간부터 간호사를 그만두게 되는 그날까지 지속될 것이다. 간호학도가 아닐때 그저 동경했던 이 자리에 지금 내가 서있는데 무엇이 그토록 날 힘들게 하는걸까?
또 다른 문제가 하나 생겼다 남자 간호학도로써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되는 군입대 문제가 다가왔다. 이는 모든 남자 간호학도들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나는 간호협회 기사에서 이러한 글을 본적이 있다 “의사들에게 공중보건의가 있듯이 간호사에게도 공중간호사 제도를 만들자” 이러한 제도가 시행 된다면 남자 간호사 및 간호 학생들에게도 지방의 부족한 간호인력을 보충함과 동시에 모든 남자간호학도의 군문제로 인한 학문의 공백기 및 정신적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남자간호사들이 더욱 더 많이 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 나에게 후회 하냐고 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NO이다. 나는 누구보다 값지고 멋진 도전 중이기 때문이다. 비록 힘들고 지칠때도 많지만 좀 더 똑똑한 간호사가 되어 환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기 때문이다.
마라톤의 꽃 러너스하이, 결승점을 향해 힘차게 달려가다
간호학을 배우면서 많은 질병에 대해서 배웠지만 나는 암에 대해 더 깊이 배우고 더 나아가 암 환자들에게 큰 힘이 되어주고 싶다. 나의 할아버지께서는 위암으로 안타깝게 돌아가셨다. 할아버지께선 위암말기로 나날이 피골이 상접해가는 모습을 보였다. 가슴이 아팠다. 그런 할아버지를 보는 아버지의 뒷모습은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처량한 모습이었다. 그런 아버지를 보는 아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그때 아버지의 눈물을 처음 보았다.
할아버지의 임종을 지켜 보았다. 내가 간호학을 배움에 있어 할아버지께서 손자에게 큰 경험을 주시고 떠나신 것 같다 임종을 지켜보며 슬픔에 잠겨 있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체인스톡호흡양상을 보이셨다 그런데 죽음 앞에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체인스톡호흡을 하면서도 마지막 남은 가족을 기다리고 계셨다. 한 가족을 제외하곤 모든 가족들이 할아버지와 인사를 마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는 편히 가시지 못하고 죽음의 경계에서 사투를 벌이고 계셨다.
나는 할아버지가 큰아버지가족과 마지막인사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서울에서 내려오고 있던터라 시간이 많이 걸렸다. 마침내 몇 시간이 지난 후 큰아버지가족이 도착하여 할아버지를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리며 마지막 인사를 건냈다. 물론 의사소통은 불가능했다. 오로지 우리의 인사를 듣고만 계셨다. 인사를 나눈 직후 마침내 할아버지의 피부는 싸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ECG모니터에서 들려오는 “삐” 소리와 함께 슬픔에 잠겼다. 할아버지의 양쪽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새벽녘 비상구전등만이 유일한 불빛인 어두운 복도에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렀다.
아직도 잊을 수 없다. 할아버지의 그 마지막 눈물은 내 가슴 한켠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세상 모든 임종은 가장 슬픈 동시에 가장 아름답고 위대한 것이다’. 나아가 간호사가 되어 암병동에서 암환자들을 캐어할 수 있다면 암환자 뿐만 아니라 그런 환자의 가족에게도 힘이 되어줄 수 있는 그런 간호사가 되는 것이 나의 꿈이다. 내가 간호사가 된다면 암 병동, 소아암 병동, 호스피스 병동에서 근무를 하고 싶다. 할아버지를 안타깝게 보낸 기억에 다시는 그런일이 없었으면 한다.
내가 보호자의 입장에서 경험을 해보고 나니 이러한 환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가족에게도 큰 힘이 되어줄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나 역시 이미 경험하지 않았는가...... 환자가 회복된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순 없겠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병마와 싸우더라도 즐겁게 고통 없이 후회 없이 살아 갔으면 하는 바램이다. 의료진 역시 환자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나는 환자에게 간호행위 뿐만 아니라 웃음 또한 주고 싶다. 대학생활을 하면서 웃음치료사, 레크레이션지도자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남들이 알아주는 소위 말하는 스펙에 포함되는 자격증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이 자격증이 임상에서 환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자부한다.
환자와 가족들에게 비춰지는 미래의 김태용 간호사 선생님은 웃음을 주는 간호사 선생님이고 싶다. 누구에겐 오빠 같은 또 누구에겐 아빠 같은 또 누구에겐 형 같은 또 누구에겐 아들 같은 또 누구에겐 동생 같은 그런 간호사가 되고 싶다. 나의 작지만 찬란한 꿈을 이루기 위해 지금 이 힘든 시간들을 나는 기꺼이 참고 이겨내고 싶다.
대한민국의 모든 간호사선생님들께 존경을 표하며 모든 간호대학생들에게 수고와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우리 모두 멋진 간호사선생님이 되기 위하여 앞으로도 나의 찬란한 도전은 계속 될 것이다.
현재 간호학과에 재학중인 나는 처음부터 간호학에 발을 들여 놓지 않았다. 나는 체대생이었기 때문이다 체대생이 어떻게 간호학과에 다니고 있을까?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닌가? 나는 이 아이러니한 일을 모든이에게 들려주려 한다.
당시 고등학교에 재학중인 나는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던 찰나 직업이 간호사인 고모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용아 너는 섬세하고 꼼꼼해서 간호사가 어울리는 것 같다 어떻게 생각하니?” 나는 고모의 말을 웃어 넘겼다 그렇다 남자간호사가 웬말인가 간호사는 여성들의 직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간호학과는 취업률이 높아 성적이 높아야만 갈 수 있는 그저 동경의 대상이였다.
성숙의 장
나의 20살로 돌아가자면 평소 운동을 매우 좋아했던 나는 체육선생님이라는 목표가 생겼다 시간이 흘러 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렇다. 현실은 체육학과였다. 오직 체육선생님이 되겠다는 목표 하나만으로 나는 학업에 임했다. 노력한 만큼 성적도 나와 꿈에 다가설 수 있었다.
당시 다른것에는 관심이 없던 나에게 새로운 관심거리가 생겨났다. 그것은 바로 해외봉사였다. 때마침 학교에서 해외봉사단을 선발 하던터라 나는 망설임 없이 지원하게 되었고 1차 서류전형을 통과하고 2차 최종면접까지 치르고 난 후 당당히 합격하였다. 총 30명을 뽑았는데 20살 신입생은 나 혼자였다. 다들 3.4학년 선배들이였다. 그때 들었던 첫 생각은 ‘내가 막내니까 귀여움을 받겠구나’ 라고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그랬을지 몰라도 내적으로는 많이 힘들었다.
6개월 동안 프로그램을 준비하면서 형, 누나들에겐 배울 것이 정말 많았다. 같이 생활하다 보니 막내인 나는 사소한 것 일지라도 30명 봉사단원의 장점을 하나하나 보고 배울 수 있게 되었다. 캄보디아에서 작은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나는 막내라는 이유로 일을 잘 찾아서 하지 못해 형들에게 많이 혼이 났다. 나는 정말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형들 눈에는 그리 보이지 않았나보다. 나는 어린마음에 울컥함과 동시에 나의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혼자 버스 뒤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던 중 리더형이 나에게 이런말을 해주었다. “태용아 많이 서러웠겠구나. 나는 좋은 리더가 아닌 것 같다. 지금 네가 이렇게 힘들어 하고 있잖아. 하지만 네가 리더가 되었을땐 정말 좋은 리더가 될거야. 막내의 자리에서 이런 경험을 해보았으니 넌 리더로써 약자들의 마음까지도 헤아려 줄 수 있을거야. 이번 계기가 너에게 좋은 약이 될거야” 정말이지 너무 고맙게 생각한다. 이렇게 하루하루 어린 나 자신은 성숙해져가고 있었다.
해외봉사 도중 나는 캄보디아에서 에이즈병원에 가보았다. 처음에는 거부감이 먼저 들었다. 에이즈라는 병이 무서웠고 내가 왜 저기에 가야하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병원에 간 이후 나는 그런 생각을 한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에이즈에 걸린 꼬마아이들은 약기운 때문인지 하루종일 무기력해 보였다. 말없이 다가와 손을 내미는 아이의 손을 꽉 잡아주기도 하고 안아주기도 했다.
그러던 중 한 아이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이제 죽어요. 하지만 나는 지금 너무 행복해요. 지금 여기서 밥을 먹을 수 있어서 좋고 친구들과 같이 공부를 할 수 있어서 좋아요” 그 아이는 웃고 있었다. 정말일까? 자신이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는게 가능할까? 그런 아이를 보고 나는 내 자신이 정말 부끄러웠다 이후 나는 하루하루를 더 열심히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간호사라는 목표의 길 위에 한 발짝 걸음을 내딛다
정말 내가 간호학과를 원하게 된 계기는 나의 취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나에게는 특별한 취미가 있다. 다큐멘터리를 챙겨보는 것이다. 내가 다큐멘터리를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경험과 공감이다. 주변에서 쉽게 볼 수없는 것들을 볼 수 있다. 또 가난한 사람의 입장도 되어 보고 성공한 사람의 입장도 되어 볼 수 있다.
나는 특히 생명을 다루는 다큐멘터리에 관심이 많았다. MBC에서 휴먼다큐 사랑이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한 적이 있다. 이걸 본 후 나는 간호사라는 직업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서연이라는 아이가 소개 되었는데 장기 곳곳에서 다발적으로 원인모를 출혈이 생기는 불치병을 앓고 있었다. 어린 아이가 씩씩하게 병마와 싸우는 모습을 보고 대견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였다.
이 프로그램을 보고 나는 이런 어린 환자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현대의학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병을 앓고 있는 이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이때 들었던 생각이 바로 ‘간호’이다. 24시간 환자를 지켜보며 변화에 즉각적으로 대처하고 보살필 수 있는 직업은 바로 간호사이다.
나는 이런 어린 환자들에게 작지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파 5월 5일 어린이날을 기념해 백혈병을 앓고 있는 그 어떤 어린 환자에게 선물을 주기로 결심했다. 바로 조혈모세포기증을 신청했다. 하루빨리 나의 어린이날 선물을 받아가는 어린 환자가 나타났으면 하는 바램이다. 이로 인해 나는 간호사라는 꿈에 대한 열망이 더욱 더 뜨겁게 느껴졌다.
간호사라는 목표의 길 위에서 출발 소리와 함께 나의 마라톤은 시작되었다.
이후 간호사가 되기로 결심한 나는 간호학과에 진학하는 것이 당장의 목표가 되었다. 당시 나는 학과에서 괜찮은 성적을 유지하여 덕분에 교직이수도 할 수 있었고 교수님들의 기대도 컸다. 동시에 해병대예비장교후보생에 선발되어 내가 가야 할 길이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 모든 것들을 포기해야 했다. 이 모든 것을 포기할만한 가치 있는 도전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간호학과로 편입을 하기 위해 그때부터 나는 간호학과에 재학중인 여자친구의 도움을 받아 간호학에 대한 공부도 하게 되었다. 같이 도서관을 다니면서도 느꼈지만 간호학과 학생들은 존경스럽다. 토익, 전공, 봉사활동, 자격증 등 학업에 열중하는 모습이 얼마나 멋있는가. 더군다나 전공서적도 두껍고 멋있는 의학용어가 가득했다. 그렇다 간호학과는 공부를 잘해야 오는 학과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더 멋있어 보였다.(머지않아 이러한 동경이 시련과 고난으로 다가올 줄은 꿈에도 모른채......^^)
어느덧 편입원서를 넣고 면접장에 내 자신이 앉아 있었다. 다수의 교수님들께선 나를 꽤나 흥미로운 녀석으로 보았다. 체대생이 간호학과에? 교수님들께서도 이런 경우는 처음인듯 싶었다. 나는 자신이 있었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줄줄이 불합격 소식을 듣고 있었다.
마침내 나는 성공했다. 현재 다니고 있는 학교와 대구한의대 간호학과에 합격 하였다. 현재 다니고 있는 학교는 2명을 모집하였고 대구한의대는 1명을 모집하였다. 대구한의대에서 같이 면접을 본 학생이 어찌나 말을 잘하던지 결과는 내가 합격이고 그 친구는 예비1번이었다. 현재 다니고 있는 학교를 최초합격을 해놓은 상태인 나는 더 좋은 환경의 학교에 끌렸던건 사실이지만 한 사람의 꿈을 짓밟을 수 없었다. 그 친구는 선택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친구 또한 나와 같이 어떠한 계기를 통해 간호사가 되기로 결심을 했을텐데 나의 꿈이 소중하듯이 그 학생의 꿈 또한 소중할 것이라 생각하여 양보를 해주게 되었다. 마침내 나는 그 학교의 합격포기를 선택하였다. 현재 재학중인 학교 후배들이 나에게 이런말을 한다. “저 같으면 거기 갈 것 같아요 왜 그러셨어요?” 나는 웃어 넘기며 대답한다.
마라톤 도중 찾아온 고통과 갈증
마침내 간호학과에 입학하게 된 나는 지금 새로운 도전중이다. 남중, 남고, 체대를 다니던 남학생이 간호학과에 다니고 있다. 적응은 할 수 있을까. 걱정 했지만 잘 적응해 나가고 있다. 더 큰 문제는 학업에 대한 문제였다. 문과를 나오고 체대를 다니던 내가 이과계열인 간호학을 배우려니 문제가 많았다. 수업을 들으며 용매, 용질 조차도 모르는 나는 하루하루 뒤처지기 일쑤였다. 정말이지 너무 힘이 든다.
임상에 나가 계신 모든 간호사선생님들이 존경스럽게 느껴진다. 이러한 과정을 어떻게 다 견디셨을까 남들보다 덜 자고 덜 놀고 더 열심히 해야한다. 대학에 입학한 순간부터 간호사를 그만두게 되는 그날까지 지속될 것이다. 간호학도가 아닐때 그저 동경했던 이 자리에 지금 내가 서있는데 무엇이 그토록 날 힘들게 하는걸까?
또 다른 문제가 하나 생겼다 남자 간호학도로써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되는 군입대 문제가 다가왔다. 이는 모든 남자 간호학도들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나는 간호협회 기사에서 이러한 글을 본적이 있다 “의사들에게 공중보건의가 있듯이 간호사에게도 공중간호사 제도를 만들자” 이러한 제도가 시행 된다면 남자 간호사 및 간호 학생들에게도 지방의 부족한 간호인력을 보충함과 동시에 모든 남자간호학도의 군문제로 인한 학문의 공백기 및 정신적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남자간호사들이 더욱 더 많이 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 나에게 후회 하냐고 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NO이다. 나는 누구보다 값지고 멋진 도전 중이기 때문이다. 비록 힘들고 지칠때도 많지만 좀 더 똑똑한 간호사가 되어 환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기 때문이다.
마라톤의 꽃 러너스하이, 결승점을 향해 힘차게 달려가다
간호학을 배우면서 많은 질병에 대해서 배웠지만 나는 암에 대해 더 깊이 배우고 더 나아가 암 환자들에게 큰 힘이 되어주고 싶다. 나의 할아버지께서는 위암으로 안타깝게 돌아가셨다. 할아버지께선 위암말기로 나날이 피골이 상접해가는 모습을 보였다. 가슴이 아팠다. 그런 할아버지를 보는 아버지의 뒷모습은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처량한 모습이었다. 그런 아버지를 보는 아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그때 아버지의 눈물을 처음 보았다.
할아버지의 임종을 지켜 보았다. 내가 간호학을 배움에 있어 할아버지께서 손자에게 큰 경험을 주시고 떠나신 것 같다 임종을 지켜보며 슬픔에 잠겨 있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체인스톡호흡양상을 보이셨다 그런데 죽음 앞에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체인스톡호흡을 하면서도 마지막 남은 가족을 기다리고 계셨다. 한 가족을 제외하곤 모든 가족들이 할아버지와 인사를 마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는 편히 가시지 못하고 죽음의 경계에서 사투를 벌이고 계셨다.
나는 할아버지가 큰아버지가족과 마지막인사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서울에서 내려오고 있던터라 시간이 많이 걸렸다. 마침내 몇 시간이 지난 후 큰아버지가족이 도착하여 할아버지를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리며 마지막 인사를 건냈다. 물론 의사소통은 불가능했다. 오로지 우리의 인사를 듣고만 계셨다. 인사를 나눈 직후 마침내 할아버지의 피부는 싸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ECG모니터에서 들려오는 “삐” 소리와 함께 슬픔에 잠겼다. 할아버지의 양쪽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새벽녘 비상구전등만이 유일한 불빛인 어두운 복도에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렀다.
아직도 잊을 수 없다. 할아버지의 그 마지막 눈물은 내 가슴 한켠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세상 모든 임종은 가장 슬픈 동시에 가장 아름답고 위대한 것이다’. 나아가 간호사가 되어 암병동에서 암환자들을 캐어할 수 있다면 암환자 뿐만 아니라 그런 환자의 가족에게도 힘이 되어줄 수 있는 그런 간호사가 되는 것이 나의 꿈이다. 내가 간호사가 된다면 암 병동, 소아암 병동, 호스피스 병동에서 근무를 하고 싶다. 할아버지를 안타깝게 보낸 기억에 다시는 그런일이 없었으면 한다.
내가 보호자의 입장에서 경험을 해보고 나니 이러한 환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가족에게도 큰 힘이 되어줄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나 역시 이미 경험하지 않았는가...... 환자가 회복된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순 없겠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병마와 싸우더라도 즐겁게 고통 없이 후회 없이 살아 갔으면 하는 바램이다. 의료진 역시 환자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나는 환자에게 간호행위 뿐만 아니라 웃음 또한 주고 싶다. 대학생활을 하면서 웃음치료사, 레크레이션지도자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남들이 알아주는 소위 말하는 스펙에 포함되는 자격증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이 자격증이 임상에서 환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자부한다.
환자와 가족들에게 비춰지는 미래의 김태용 간호사 선생님은 웃음을 주는 간호사 선생님이고 싶다. 누구에겐 오빠 같은 또 누구에겐 아빠 같은 또 누구에겐 형 같은 또 누구에겐 아들 같은 또 누구에겐 동생 같은 그런 간호사가 되고 싶다. 나의 작지만 찬란한 꿈을 이루기 위해 지금 이 힘든 시간들을 나는 기꺼이 참고 이겨내고 싶다.
대한민국의 모든 간호사선생님들께 존경을 표하며 모든 간호대학생들에게 수고와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우리 모두 멋진 간호사선생님이 되기 위하여 앞으로도 나의 찬란한 도전은 계속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