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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회 간호문학상 소설 가작
0생의 공식
[편집국] 편집부   news@koreanurse.or.kr     기사입력 2012-12-20 오후 14:33:48
- 홍예진(경남대 3학년)

1. 꿈
영생을 꿈꾸는 남자가 있었다.


2. 꿈이었다. 나는 눈을 뜬다. 늘 보던 천장이 보이는 게, 집이다. 안도감이 느껴진다. 꿈을 꿨다. 꿈속에서 나는 영생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이었다. 결국 나는 영생을 이루지 못한 채, 매우 노쇠한 노인이 되었다. 영생이라. 어째서 꿈속이 되면 그런 생각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째서 깨고 나면 허무맹랑해지는지.

출근할 준비를 해야 했다. 조금 더 이불 속에서 뒹굴고 싶었지만 지각하고서 부장에게 한소리 들을 걸 생각하면 어서 일어나야했다. 애써 몸을 일으킨다. 아침을 챙겨먹을 시간은 없었다. 허둥지둥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내가 사는 곳은 작은 오피스텔이다. 대궐 같은 곳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깨끗했고, 나만의 공간이란 점에서 나는 이 오피스텔이 마음에 들었다. 어려서부터 식구가 많은 탓에 집 안에서 개인 공간을 갖기란 어려웠다. 나는 지금 어른이고, 여기는 나만을 허락하는 공간이다. 다달이 돈을 내고 빌려 쓰고 있다. 집구하기 어려운 게 요즘 세상이니까.

나는 차가운 아침 공기를 맞으며 밖으로 나왔다. 찬 공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 오늘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된 차에 차키를 꽂는다. 시동을 걸고 출발. 회사를 향해. 이렇게, 오늘도 하루가 시작된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늘상 왜 하는 지도 모르는 자판 두드리기는 굳이 따지자면 타자연습쯤 된다. 복사, 프린트, 결제확인, 커피마시기 그리고 부장에게 태이기 등을 하고나면 저녁때쯤에는 곤죽이 되어 집에 들어온다. 아직 월요일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회사 일은 재밌지도, 그렇다고 지루할 틈을 주지도 않는다. 의미 없는 일들을 하며 시간을 축내다 6시가 조금 넘어 퇴근을 했다. 9시부터,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8시 50분부터 6시까지 계속해서 타자기를 놀리고, 모니터를 쳐다보고, 바삐 프린트를 하고, 팩스를 보내고, 울어대는 전화를 달래고, 별로 친하지도 않은 회사 동료들과 점심을 때우고, 자판기 커피를 마시고, 또 부장에게 한 소리를 듣고. 그리고 다시 모니터 앞으로 복귀.

우리 회사는 그렇게 어마어마한 대기업은 아니다. 학생 때 누구나 대기업을 꿈꾸지만 지금 내 처지는 대기업도 아니고. 잔심부름이나 하는 말단 사원이다. 용의 꼬리가 되려거든, 닭의 머리가 되랬다. 나는 닭의 발톱노릇하기에도 힘이 부친다. 부장은 닭의 머리가 됐다. 사실 별 볼일 없는 사람이다. 작은 회사에서 비리가 있으면 얼마나 있겠냐 하겠지만 부장은, 닭의 머리는, 새대가리답지 않게 영악하게 움직였다. 말단인 내가 아는 것만 해도 몇 가지가 되니, 안 봐도 뻔하다. 소문에 의하면 회사 여직원들에게 찝쩍대기까지 한다고 하더라.

휴대폰 시계가 정확히 6시가 되기를 기다린다. 조금씩 눈치를 보기를 몇 분. 우물쭈물. 머뭇머뭇. 그러다 드디어 ‘수고하셨습니다.’를 했다. 나를 평온한 나만의 공간으로 이동시키는 마법의 주문이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얍. 사실 ‘수고하셨습니다.’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쓰는 말이라더라. 하지만 뭐, 인사할 때만큼은 내가 좀 윗사람이 된다한들, 뭐가 문제겠는가. 닭의 머리 부장께. 수고하셨습니다.

집으로 와서 티비 앞에 드러누워 채널을 돌렸다. 나랑 상관없는 세상 저편의 일들이 무작위로 흘러나온다.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 TV 속의 이야기는 브라운관이라는 방어막이 쳐져있어 나를 안심시킨다. 그 어떤 이야기가 그 속에서 증폭된다 하더라도, 그 어떤 갈등도 나를 해칠 수 없기에. 그런 것에 위안을 느끼다 서서히 몸이 무거워졌다. 티비 속에선, 나완 상관없는 사람이, 나완 상관없는 말을 따뜻하고 다정하게 하고 있었다. 피곤했다. 잠이 온다. 내일은 아직 수요일이다. 수, 목, 금, 토……. 뒤죽박죽의 내 의식은 점점 흐려지며 티비 속 개그맨들의 소리는 점점 낮고 일그러지며 차차 지워져갔다. 온 몸에 힘이 빠지며 그렇게 잠들었다. 그리고 나는 방전된 배터리처럼 숨죽여 잤다.


3. 또 다시 아침.
눈을 떴다. 또 한 차례 이상한 꿈을 꾼 모양이다. 늦잠을 잤다. 꿈은 끝부분만 희미하게 기억에 남았다. 노인이 된 내 모습. 그래도 다행이다. 그런 꿈을 꾼 것 치곤, 그리고 그 때문에 알람을 듣지 못한 것 치곤 일찍 일어났다. 대충 씻은 후 갈아입을 옷을 고르는데 이상한 느낌이 든다. 내가 어제 옷을 갈아입고 잤던가? 피곤해서 바로 잤던 것 같은데....... 주변을 잠시 살핀다. 어쩐지 늘 보던 집이 이상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내 짙은 회색양복을 집었다. 다시, 오늘의 시작이다. 나는 또 다시 회사로 향한다.

회사는 어제와 같았다. 부장은 또, 난리를 친다. 누가 또 잘못했나보다. 들려오는 부장의 고함소리를 뒤로한 채 나는 다시 모니터를 본다. 회사 일이란 게 늘 반복되는 거라 특별히 이상하단 걸 느끼진 못했지만, 단 한 가지. 미스 김이 어제도 커피 잔을 깨더니 오늘도 깨더라는 것. 깨진 커피 잔을 앞에 두고 부장은 또 한마디를 거든다. 부장의 한 바탕이 지나가고 난 뒤 나는 “주희씨 괜찮아요?” 위로와 의례가 섞인 말을 건넨다. 미스 김을 부를 땐 미스 김이라고 부르면 안 된다.

얼마 전 회사 여직원들이 남녀차별과 여성인권을 문제 삼은 적이 있었다. 뭔가 뒷얘기가 있었던 것 같은데 자세한 것 까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그런 것 때문에 회사에서는 누구누구 씨라고 불러야한다. 그 후론 부장도 미스 김이란 말을 쓰지 않는다. 나는 미스 김이라는 말이 너무 익어버려 주희 씨라는 말이 어색하다. 아마 부장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그런데도 꿋꿋이 ‘김주희씨’라고 부르는 걸보면. 정말 뭐가 있었긴 있었나보다. 하긴, 21세기에 무슨 미스 김이냐. 주희씨 다친데 없어요? ‘주희’씨란 말에 힘을 주어 말한다.

오늘 하루도 이렇다 할 내용 없이 끝이 났다. 이런 걸 보면 회사가 어떻게 유지되는지가 의문이다. 회사란 별 내용 없는 일과의 집합소 같았다. 나는 그런 회사에서 이렇게 하루하루를 허비해도 되는 걸까.

요즘 들어 회사에서는 개성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시계 옆 게시판의 표어가 바뀐 것 빼고는 바뀐 게 없다. 직원들은 볼트, 너트와 같은 나사다. 개성이 있어선 안 된다. 개성이 있는 나사, 남들과 다른 나사는 적당히 끼워질 곳이 없어 쓸모가 없다. 나사가 아무리 변해도 홈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직원들은 회사를 유지시키기 위해 좁은 틈에 몸을 돌려 끼워 넣고 있다. 다만 나사는 녹이 슬면 바꿔 끼워버리면 그만이다. 그래서 만날 회사에 나가 나 여기 녹슬지 않고 잘 끼워져 있어요. 라고 몸부림을 치는 것이다. 끼릭끼릭 나사는 돈다.


4. 수요일.
어김없이 다음날은 찾아왔다. 나는 또 회사에 나왔다. 오늘도 주희씨는 커피 잔을 깼다. 몇 잔째 깨어먹는 걸까. 저래선 회사에 커피 잔이 남아나질 않겠다. 나는 별 상관없다. 난 자판기 커피를 마시니깐. 나는 오늘도 충분히 쓸 만한 나사란 걸 알리려 출근을 했다지만, 주희씨는 저러다간 다른 나사로 바꿔 끼워질 거다. 잘나지 못한 이상, 나처럼 사고 없이 회사에 묵묵히 다니면 될 텐데. 쨍그랑 쨍그랑. 주희씨의 나사가 휘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5. 목요일.
늘 그렇듯 또 다시 내일은 오늘이 되었다. 화요일은 수요일이 되고, 수요일은 목요일이 된다. 오늘은 목요일이다. 이제 목요일은 금요일이 될 거고, 토요일을 지나 일요일이 될 거다. 그리고 다시 월요일이겠지....... 직장인의 일주일엔 사계절의 이치가 담겨져 있다. 겨울다음엔 봄이 온다는 것. 그리고 봄이 지나 다시 겨울로 되돌아온다는 것. 다만 일요일의 봄을 기다리기에 월화수목금토의 겨울은 너무 쌀쌀 하달까.

“쨍그랑”

또 다시 주희씨가 커피 잔을 깼다. 무서우리만큼 규칙적인 여자였다. 어제도, 그제도, 분명 이 비슷한 시간에 커피 잔을 깨어먹었다. 부장은 또 한마디 거들었지만, 연달아 벌써 몇 잔째 커피 잔을 깨어먹는 사원에게 하는 말 치곤 유순한데가 있었다. “주희씨 괜찮아요?” 나는 어제와 그제와 같은 말을 했다. 돌아오는 대답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어제와 그제와 같은 말이었다. 일순간 소름이 돋았지만,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의례적으로 하는 말은 비슷하기 마련이라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주희씨 괜찮아요?’라고 한 것처럼 말이다.

순간 고개를 돌려 회사에 남은 커피 잔을 샜다. 하나, 둘, 셋, 넷....... 정수기 옆에는 넉 잔의 커피 잔이 엎어져 있었다. 원래 몇 개였더라......? 그렇게 깨먹고도 저렇게 남았데?

“하하, 주희씨 어제 오늘 왜 이렇게 커피 잔을 많이 깨먹어요. 다치지는 않았어요?”

나는 깨진 커피 잔 조각을 주우며 호탕한 매너남의 대사를 읊조렸다.

그러자 주희씨는 이상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곤 빗자루를 가지러 가버렸다. 뭔가 강력한 것이 뇌리를 찍었다. 벽에 붙어있는 전자시계를 본다. 시간 옆에 달력도 함께 표시돼 있다. 날짜가...... 27일? 게다가 월요일? 오늘은 분명 목요일인데. 신문을 봤다. 2012년 11월 27일. 27일? 월요일? 어제 신문이겠지. 다시 이번에는 티비를 켜 뉴스를 보았다. 뉴스화면의 오른쪽 위에는 날짜와 함께 요일이 써져있었다. 27일....... 월요일. 뉴스도 재방송을 하던가.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 호흡을 가다듬고 검색창을 띄워 ‘오늘 날짜’를 쳐보았다. 27......일? 오늘은 27일 월요일…….

오늘은 27일 월요일이다.

언제부터였을까. 모든 것들이 반복되고 있었다. 어차피 일들은 모두 반복된다지만, 이런 식은 아니다. 어제 있었던 모든 일들이, 다시 오늘 일어난다. 27일은 반복된다. 27일, 27일, 27일....... 월요일, 월요일, 월요일....... 나는 시간 속에 갇혀버렸다. 나도 모르는 새. 이제 내 삶은 영원히 27일이다.


6. ‘결국 이 모든 건 꿈이었다.’
라고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날 이후로도 몇 밤을 잤고, 나는 여전히 27일을 벗어날 수 없었다. 오늘 또 오피스텔 천장을 보며 눈을 떴다. 아마도 이 27일은 영원히 계속될 것 같다. 해는 매일 뜬다는 사실. 하지만 단 하루라도 해가 뜨지 않는다면 그것은 절대불변의 진리가 아니게 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안다. 내일도 해가 뜰 거라는 것을. 그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알 수 있었다. 내일도 27일은 계속될 것이라는 것을. 아마 나는 영생을 얻었다. 꿈속의 내가 이루지 못한 영생을.

늘 그렇듯 오피스텔에서 나와 회사로 가려던 발걸음은, 얼마 떨어지지 않은 전봇대 앞에서 멈춘다. 그리고 하늘을 본다.

‘그럼 뭐하지?’

낯선 생각이었다. ‘뭐하지’라는 그 짧은 한마디가. 그러고 보면 나는 그동안 일상을, 하루를 그냥 쏟아버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버스가 4대가 지나갔다. 요 앞 신호등이 8번, 파란불로 깜빡였다. 나는 여전히 전봇대 앞에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허탈한 웃음을 내뱉고는 호주머니 속 차키를 만지작거리다가 내 차 앞으로 간다. 회사 간다.

“결국 또 회사냐.”

차를 타고 가는 내내 생각한다. 이제 나는 ‘그’가 된다. 나는 최대한. 나를 ‘그’로 바라보려 애쓴다. 남 일처럼 웃어넘길 수 있게끔. 핸들을 잡은 그의 손은 긴장한 듯 땀을 머금었고, 몇 번의 심호흡을 하더니. 이내 즐거운 듯이 낄낄대기도 한다. 그의 얼굴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 표정에서 저 표정으로 다양하게 바뀐다. 그러다 신호를 위반하고 지나가던 자전거를 칠 뻔하기도 한다. 그래도 그는 상관없다고 여긴다.

그의 차가 어떤 건물에 도착하고, 주차장으로 들어간다. 회사의 직원은 무료이용이지만 그는 돈을 내야한다. 사실 그는 이 회사의 정규직원이 아니다. 그는 마치 그런 것인 양 착각하고 싶어 했지만. 대학 졸업을 계속해서 미루고 있는 그는, 이 회사의 아르바이트생이다. 그는 이걸 연수라고도 말했고, 어머니와의 통화에서는 인턴이라는 말을 썼다. 그러면서 폰에 저장된 수십 개의 번호를 뚫어져라 살피다 겨우 통화버튼을 누르고서는, 벌써 연락 하고 산지도 오래되었던 친구에게 술을 사기도 했다.

그는 흰 선으로 표시된 사각형을 찾아 차를 맞춰 넣고 차에서 내렸다. 고개를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갸우뚱하다가 하얀 선과 일직선이 된 바퀴를 보고서 만족한 듯 마음을 다잡았다. 평행. 영원히 만나지 않을 거다.

쑥쑥한 지하주차장을 걸어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향한다. 엘리베이터 앞에는 방금 온 듯 중년남자가 엘리베이터 문 위에 새겨지는 빨간 숫자를 보고 있었다.

“부장님 안녕하십니까.”

“좀 일찍일찍 좀 다녀라.”

중년남자는 그를 곁눈질로 살피며 말한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연다.

“부장님부터 좀 일찍일찍 다니시고 그런 말씀 하세요.”

중년남자의 눈길이 곁눈질에서 쏘아보는 것으로 바뀐다.

“뭐?”

그는 얇실한 미소를 띠며 다시 말한다.

“아뇨, 별거 아닙니다. 부장씩이나 되면 괜히 밑에 사람 눈치 주지 말고 솔선을 보이면 어떨까 해서 말입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부장님이 언제부터 그런 것들, 신경 썼습니까.”

중년남자는 황당하다는 듯, 하지만 화가 났다는 것을 표정으로 분명히 전하며 대꾸했다.

“지금 이거 뭐하는 거야?”

“제가 틀린 말 했어요? 윗사람 대접을 받고 싶으면 그렇게 행동하라고요.”

“이 자식이 이게......!”

띵동.

엘리베이터는 도착했고,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 안에 탈 동안 잠시 숨을 돌릴 틈을 주었지만. 이내 다시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 안은 불편한 분위기가 피어올랐다. 흡사 화생방.

“야, 너 알바생. 이 달하면 끝이라고 막나가는 거야? 너 취직 안할래?”

“뭐 꼭 취직시켜주실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그리고 저도 일 배우러 온 거지. 그냥 알바해서 푼돈 받으려고 온 거 아닙니다. 알바생, 알바생 하지 마시죠. 부하직원들한테 치근덕대기나 하고.”

“뭐? 너 사람 모함하지 마! 이게 생사람 잡네? 야, 너 나가. 보자보자 하니까.”

그는 중년남자를 툭 하고 밀치더니

“네, 그러려고요. 오늘 제 짐 싸러 온 겁니다.”

띵동. 5층입니다.

그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사무실로 들어간다. 사무실 안에는 정수기가 있고, 그 옆으로 커피 잔이 놓여있다. 그는 컵에 찬물을 채워 벌컥벌컥 마신다. 물을 채 다 마시기 전에 중년남자가 소리를 지르며 들어온다.

“야! 저 알바생. 오늘부로 일 못하게 해.”

중년남자의 목소리가 사무실에 울린다.

이미 일찍 와 일을 보던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져 부장을 바라본다.

“부장님, 무슨 일이신지.......”

그 사람들 중 은색 테 안경을 쓴 사람이 조심스레 묻는다.

“저거저거, 사람 아니야. 사람 덜됐어. 어쩌자고 저런 거 뽑았어? 아무리 하찮은 알바자리라도 저런 거 뽑으면 돼?”

이번에는 사람들의 눈이 그를 향한다. 그는 아직 물을 마시고 있다. 아니, 사실 물은 다 마셨지만 컵을 입에 대고 있었다. 컵을 입에서 떼며 그가 말했다.

“네. 저. 오늘부터 회사. 안 나옵니다. 안녕히들 계십시오. 저도 저런 사람 밑에서 일할 생각 없습니다.”

그는 손에 있는 커피 잔을 다시 선반 위에 놓더니, 그 손으로 선반 위의 모든 커피 잔들을 쓸어내려버린다.

쨍그랑쨍그랑쨍그랑쨍그랑쨍그랑

다섯 잔이나 되는 커피 잔이 각각 소리를 내며 깨진다. 묘한 엇 박에 사무실 분위기는 또 한 번 얼음장이다. 그는 이 상황을 다 지켜보고 있던 김주희에게 살며시 미소를 띠운다.

“너 지금 뭐하는 거야, 야!”

중년남자는 소리친다.

“나가려면 곱게 나갈 것이지. 너 이 바닥에서 소문 잘못나면 어떤지 몰라? 내가 말 한마디 어떻게 하냐에 따라 너 앞으로 취업 길 막혀. 알고나 하는 짓이야?”

그는 침착하게 대답한다. 이제 그의 손은 땀으로 젖어있지 않다.

“네, 압니다. 마음대로 하세요. 저 가겠습니다.”

그는 자기 자리로 보이는 책상으로 가서 몇 가지 물건을 챙긴 뒤 폭풍이 휩쓸고 간 듯한 사무실을 빠져나온다.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다. 아까 내린 그대로 인 듯 엘리베이터는 딱 5층에 있다. 문이 열린다.

그가 엘리베이터에 타 1층을 누르는 사이 다시 중년남자가 문을 가로막고서 엄포한다.

“너, 다음에 걸리기만 해라.”

그는 다시 차분한 마음으로 말한다.

“부장님도 그렇게 살지 마시죠. 그러다 벌 받습니다. 저 내려가야 합니다. 부장님이 나가라 하셨지 않습니까. 저도 여기서 한가하게 노닥거릴 시간 없습니다.”

“그래. 너 다신 내 눈앞에 띠지 마라.”

중년남자는 한걸음 물러선다.

“인생 좀 제대로 살아. 뒷돈이나 받아먹지 말고, 아랫사람들 봉처럼 부리지 말고.”

그는 빨리 닫히지 않는 엘리베이터 문을 재촉하기 위해 닫힘 버튼을 몇 번이고 눌렀다.

“야, 뭐?!”

문이 닫힙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7. 아홉 번째 27일.
그는 눈을 뜬다. 남자는 일어난다. 그는 항상 똑같은 모양의 천장을 본다. 이것은 이 괴상망측한 일이 일어나기 전에도 같았던 일이다. 하지만 시간 속에 갇혀 버리고나서는 다른 천장과 함께 하루를 시작할 가능성조차 사라져버리고 만 것이다. 남자는 자신의 하루를, 평생 이 천장과 함께 시작해야하는 것이 싫었다. 매일 똑같은 도입부가 싫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벗어날 수 없는 굴레와 같았다. 무슨 짓을 해도 좋다. 그러나 월요일의 시작은, 앞으로 남자의 모든 아침의 시작은 반지하의 천장이다. 남자는 그것을 반지하의 천장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생각하고 싶어 하는 듯 했으나, 그래도 바뀌는 건 없었다. 남자는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들을 상상하려고 했다. 예를 들어, 이 반지하의 천장을 오피스텔의 천장으로 생각하는 일 말이다.

그에게는 상상의 세계가 유일의 도피처였다. 그는 항상 빈 담뱃갑을 들고 다녔는데 그 안에 담배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담배를 상상했다.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의, 반항이었다. 담뱃갑에 엄히 새겨진 문구처럼. 경고 : 흡연은 폐암 등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되며 내 가족, 이웃까지도 병들게 합니다. 담배연기에는 발암성 물질인 나프틸아민, 니켈, 벤젠, 비닐 크롤라이드, 비소, 카드뮴이 들어있습니다. 실상 그의 호주머니에는 누군가를 타르와 니코틴으로 중독 시키고, 내 가족과 이웃을 병들게 할 것이 없었다. 비소라든가, 나프틸아민, 벤젠 같은 거 말이다.

그가 빈 담뱃갑을 들고 다니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벌써 오래 전의 일이다. 아마 그날은 또 그의 엄마와 아빠가 싸운 날이었다. 엄마는 더 이상 같이 못살겠다며 집을 나가려했고, 아빠는 그런 엄마의 양 팔목을 잡아끌었다. 그는 조용히 집을 나왔다. 싸운 건 그가 아니라 그의 엄마 아빠인데도, 그는 왜 자기가 눈물이 나는지 몰랐다.

그는 화가 나있었다. 그것을 세상에 알리고 싶어 했지만, 그럴만한 용기가 없었다. 밖으로 나와 한참을 있다가 해가 지고서야 잠을 자러 집에 들어갔다. 그럴 때마다 그는 집 문을 열기가 죽을 만큼 싫었다.

그는 세상에 잔득 화가 나있다는 걸, 세상에 알리고 싶었지만 책상에 앉아 애꿎은 교과서에 낙서를 하는 것밖에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의 교과서는 까만 낙서로 가득 채워졌다. 그러던 중 하루는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쓰레기통을 비집고 나와 있는 담뱃갑을 본 것이다. 그 담뱃갑을 보고 처음 그가 한 생각은 “예쁘다.”였다. 손에 착 들어갈 것만 같은 그 조그만 상자는, 그때부터 그에게 상상으로의 도피를 가르쳐주었다. 그는 주위를 살피더니 그 담뱃갑을 얼른 호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는 으슥한 골목길로 가서 남몰래 그 담뱃갑을 열었다, 닫았다 했다.

그리고 그 후로도 그는 빈 담뱃갑을 가방에다, 혹은 호주머니에다 꼭 넣고 다녔다. 그 작은 담뱃갑은 그에게 힘을 줬다. 그리고 그는 이따금씩 담뱃갑을 열었다가 닫았다. 그 즐거움이 최고로 달할 때는 집에 그 담뱃갑을 가져다 왔을 때였다. 혹여 들키지는 않을까. 몰래 일탈을 즐기는 자신이 대견스러웠다. 비록 그의 엄마 아빠는 그것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말이다.

껍데기뿐인 일탈은 오히려 그 때문에 그에게는 위로와 안심을 주었다. 첫째는, 그런 빈 담뱃갑이 자신의 모습과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고, 둘째는, 행여나 담뱃갑이 들키더라도 변명을 할 구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술 과제가 담뱃갑을 그리는 거라고 할 참이었다. 그는 혼나는 게 무서웠다.

하지만 한해 두해 시간이 가고, 이제는 담배를 피워도 이상할 게 없는 나이가 되었을 때, 그는 빈 담뱃갑을 버렸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다시 빈 담뱃갑을 주웠다. 습관이란 그런 것이다. 그리고 아직도 그는 화가 나는 일이 있거나, 슬퍼질 때. 그 담뱃갑을 만졌다. 지금도.

그는 손 안의 빈 담뱃갑을 계속해서 바라보다가, 결심이나 한 듯이 밖으로 나가버렸다. 오늘도 새로운 27일이 시작될 거였다.

생각해보면 그는 늘 누군가를 흉내 내며 살았다. 흉내 내는 건 쉬웠다. 스스로가 되는 것보다. 책임지는 거 없이....... 나는 내가 되어 내 스스로가 남과 부딪히는 그런 삶을 사는 것이 버거웠다. 단지 흉내를 내는 것. 나를 ‘나’가 아니라 남으로 바라보는 것. 연극 속 인물이 되는 것. 그런 것이 더 쉬웠다.

연극 속의 인물은 만들어진다. 무대 위에서 ‘그’의 행동은 허용된다. ‘그’의 행동이었다. 내가 책임질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나는. 나 스스로를 나에게서 조차 소외시켜 나갔다. 나는 없었다. 작은 담뱃갑 속에서만 움츠리고, 가끔씩 그것을 열어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제 ‘그’는 ‘내’가 된다.

나는 차를 탄다. 아니 걷는다. 한참 걸으니 지하철역이 나온다. 내려간다. 발걸음이 바쁘다. 나는 내가 가야할 길을 알고 있다. 지하철역의 쓰레기통에, 담뱃갑을 구겨 던진다. 던져진 담뱃갑은 그만 쓰레기통의 범위를 벗어나 벽에 부딪힌 후 바닥에 떨어진다. 마침 그 옆을 치우던 청소 아줌마가 눈을 흘긴다. 상관 안 쓴다.

카드를 꺼내 찍고 지하철을 탄다. 사람들은 많지는 않지만 빈자리 없이 좌석을 다 채웠다. 몇몇은 서있다. 나는 소리친다. 내가 이제까지 질렀던 소리 중에 가장 큰 소리로.

“야! 너네 그만 좀 해! 그만 하라고! 지긋지긋 하지도 않냐?”

사람들의 시선이 일시에 나에게로 집중된다.

“야! 내가 너한테 뭐 그렇게 잘못했냐! 넌 나한테 왜 이러는데! 왜!”

“내가 끼워질 틈 같은 걸……. 나한테도……. 주라고! 나도! 여기 있어!”

몇 분을 그렇게 떠들어댔다. 나는 이 사람들한테 화가 나 있었다. 아니, 사실은 세상에 화가 나 있었지만. 도대체 세상이란 게 어디를 말하는 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이 사람들에게 화를 냈다. 그래서 사실. 생각했던 것만큼 속 시원하지는 않았다. 그럼 대체 누구한테 소리 질러야한단 말인가.

내일이면 다시 리셋 된다. 내일이면 다시없던 일이 될 일들. 소리 질렀던 일. 주희씨가 커피 잔을 깼던 일. 부장에게 대들었던 일.

역을 나와 편의점에 들어간다. 담배 한 보루를 산다. 가장 독한 놈으로. 라이터도 산다. 밖에 나와 담배에 불을 붙여본다. 입에 가져간다. 한 모금 들이 마셔본다. 암전. 정신을 잃는다. 연기와 함께 하얗게 페이드아웃.


8. 다시 눈을 뜬다. 천장이 보인다. 반지하의 천장. 물을 마신다. 아침이다. 어김없이 아침은 온다. 씻는다.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아 주워온 밥통으로 데워 쓴다. 전기밥통을 열었더니 물이 없다. 할 수 없이 찬물로 샤워를 한다. 샤워라 해봤자 그리 우아하지는 못하다. 옷을 입는다. 그때 호주머니에서 담뱃갑이 만져진다. ……. 혹시나 하고 안을 들여다본다. ……. 비었다. 웃음이 난다. 집을 나선다. 집....... 좀 보잘 것 없더라도 오피스텔이었으면 좋았을 뻔 했다. 차도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처음부터 차도, 오피스텔도 없었다. 한참을 걸어 지하철역에 도착한다. 내려간다. 어제의 그 쓰레기통. 빈 담뱃갑을 신경질적으로 던져버렸던 쓰레기통. 청소 아줌마는 없다.

쓰레기통을 지나쳐 카드를 찍고 한층 더 내려간다. 지하철을 기다린다. 주위를 둘러본다.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어제 그렇게 미친 짓을 했는데도. 어제와 달리 조금 이른 시각의 출근길 지하철은 만원이다. 틈 같은 걸 허용하지 않는 게. 또, 그 속에 어떻게든 끼워 넣어 지려는 게 우리 회사와 닮았다. 그 틈바구니 속을 비집고 들어간다. 지옥이다. 지옥철.

회사 사무실이 있는 건물에 도착한다. 일부러 지하 주차장에 갔다가 올라가는 수고를 하지 않는다. 건물 1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안에는 부장이 타고 있다.

“안녕하세요.”

“좀 일찍일찍 좀 다녀라.”

“네, 다음부턴 일찍 오겠습니다.”

띵동. 5층입니다.

문이 열린다. 복도를 지나 사무실로 들어간다. 아침인데도 한창 바쁘다. 정수기 옆 선반을 본다. 커피 잔이 가지런히 다섯 잔 놓여있다. 부장의 아침인사를 시작으로 다시 바쁘게 돌아간다. 끼릭끼릭끼릭. 오늘도 잘도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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