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하단 바로가기
Home / 간호문학상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 인쇄
제30회 간호문학상 소설당선
세미이야기
[편집국] 편집부   news@koreanurse.or.kr     기사입력 2009-12-28 오후 17:47:55
-김영나(고신대학교 복음병원)


다섯 개째의 두꺼비집이었다.
두꺼비집 사이를 손끝으로 길게 긁어 길을 만들었다. 젖은 모래는 손가락이 지나간 모양대로 깊고 부드럽게 파졌다. 이어나가던 길을 멈추고 두꺼비집의 비스듬하게 막힌 뒷부분을 살살 허물어냈다. 모래를 파던 손가락 끝이 휑해지며 두꺼비집이 둥그스름한 터널로 둔갑했다. 쌓인 모래를 치워내고 다른 두꺼비집으로가 또 하나의 터널을 만들었다. 아슬아슬하게 무너지려는 터널의 천장을 굳혀놓고 나머지 세 개의 두꺼비집도 손을 보았다. 미리 손자국을 내놓았던 터널과 터널 사이의 길은 더 깊게 팠다. 땀줄기가 근질근질하게 볼을 타고 내려오는 것을 어깨로 문질러 닦고는 양동이에 손을 담가 헹궈냈다. 양동이를 제일 앞쪽 터널의 입구로 들고 가 천천히 기울였다. 모래를 튀기며 물이 쏟아지더니 이내 빨려 들어가듯 터널 안으로 흘렀다. 터널 천장의 가장자리를 무너뜨리며 흐른 물은 순식간에 구불구불한 길과 다른 터널들을 지나고 화단의 턱을 넘어 시멘트 바닥 위로 넓은 얼룩을 그리며 번졌다. 발 밑에 꿈지럭거리고 있는 공벌레를 집어들었다. 손이 닿자마자 동그랗게 몸을 말아버린 벌레를 터널 앞 통로 위에 올려놓고 다시 한번 양동이의 물을 쏟았다. 양동이의 물이 모자라 벌레는 세 번째 터널 앞에서 멈추고 말았다. 고개를 들고 이마 위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매미 울음소리가 엉긴 공장 위의 하늘은 눈이 부셨다. 화단 끝에 놓아두었던 어머니의 슬리퍼를 빈 양동이에 넣고 손목에 걸쳐들었다. 작업장을 지날 때는 어머니의 눈에 띄지 않게 걸음을 빨리 했다.

집에 가서 숙제를 하라고 떠밀린 것이 아까 인데 아직까지 공장 공터에 얼쩡거리고 있는 모습을 들키면 한 대 쥐어 박힐 것이 분명했다. 창고에 양동이를 놓고 나오는데 누가 어두컴컴한 안 쪽에서 부스럭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쌓아놓은 옷감 사이에서 까무

잡잡한 얼굴이 드러났다. 세미였다. 자기 키 만한 실타래 봉지를 들고 일어서다가 무언가를 엎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당황한 눈빛으로 이쪽을 쳐다보다가 나인 것을 알고는 이내 옷을 털고 일어났다. 가서 도와줄까 망설이고 있는데 작업장 쪽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이름은 세미였지만 공장장 윤씨는 자기 멋대로 장미라는 호칭을 붙여놓았다. 그리고 그녀를 부를 때마다 생김만큼이나 걸쭉한 목소리로 능글맞게 󰡐장󰡑발음에 힘을 주어 올리곤 했다.

우리 장미가 요즘 살 좀 찐 거 같네. 등의 살가운 소리도 자주 했지만 조금만 심사가 뒤틀리는 모습을 보이면 가차없이 등신, 노린내나는 년이라는 욕이 날아갔다. 어머니는 사람이란 제 나라를 떠나 살면 다 그렇게 욕보기 마련이라고 했다. 게다가 세미의 나라는 내 한달 군것질 값이 생활비로 여겨질 만큼 가난해서, 이곳에 와 무시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했다. 공장에는 그녀말고도 몇 명의 외국인들이 더 있었는데 다들 덩치가 왜소한 남자들이었다. 라면을 반으로 부수어서 반쪽은 그냥 스프를 뿌려 씹어먹고 반만 물을 끓여 집어넣었다. 부엌 구석에 뭐가 빛나고 있어 보니 거미줄이 쳐져 있다. 고무 슬리퍼의 바닥으로 거미줄을 닦아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만 해도 어머니는 사내녀석이 부엌에 들어가면 고추가 떨어진다며 부엌 근처로는 얼씬도 하지 못하게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점심은 기본이요 어머니의 야근이 있는 날이면 저녁까지도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 열어놓은 문으로 옆집 인철이가 좁은 골목을 미끄러지듯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아이들이 그 뒤를 우르르 따라간다. 며칠 전 인철이 녀석이 천 원만 내면 타보게 해준다고 꼬드겼지만 자존심이 상해 됐다고 소리쳤다. 자기네 엄마가 한달 부업을 해서 사 준 것이라고 뻐겨대던, 요즘 한창 유행하는 바퀴가 달린 신발이다. 휑해진 길을 보고 있다가 골목에 비스듬히 선 전신주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인터넷 광고 포스터가 밑 부분이 가위질된 채 너덜거리고 있었다.

어머니와 세미는 마주보는 자리에서 미싱을 돌렸다. 귓바퀴를 박는 듯한 미싱소리와 탁한 먼지 속에서 세미는 고개한번 들지 않고 손을 놀렸다. 어머니는 내가 찾아온 것이 못마땅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작업장 안은 숨이 막힐 정도로 더웠다. 사람들의 땀 냄새와 머리가 아플 정도로 진동하는 석유냄새, 이따금씩 코와 입안으로 날아 들어오는 실밥은 재채기를 나게 했다. 군것질 값을 받아내려 왔는데 어머니는 주머니에 돈이 없다며 기다리라고 했다. 그렇게 옆에 서 있기를 십 분, 슬슬 짜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옷깃을 잡아끌자 어머니는 버럭 신경질을 냈다.
"미야 너 천 원짜리 하나 있으면 좀 빌려줘라."
어머니가 참다못한 말투로 세미를 불렀다. 세미는 작업복을 뒤적이더니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러다가 시계를 보고는 펼쳐진 옷감을 추슬러놓고 일어나서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어머니는 내 머리를 한번 쥐어박고는 가보라고 했다. 세미는 보관함을 열고 옷가지를 뒤적였다. 어깨를 훨씬 넘어서는 그녀의 긴 머리는 까맣고 부석거려 보였다.
"부탁... 할.. 거 있어요."
세미가 가지런하게 접힌 돈을 꺼내 쥐더니 띄엄띄엄 말했다.
편지지를 사다달라는 것이었다. 세미는 포장 작업장 앞에서 한 아줌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줌마는 내가 오는 것을 보자 생각났다는 듯 작업복 주머니에 넣고 있던 손을 빼고 일을 하러 들어갔다.
" 동생도.. 너만해요.."
세미는 편지지를 받아들고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양 볼이 햇빛을 받아 윤이 났다. 세미 가까이에 있자 특이한 냄새가 풍겼는데 사람들 말만큼 이상한 냄새가 아니라 어딘가 낯익게 코끝을 스치는 냄새였다. 나는 그녀가 우리말로 내게 말을 건다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빨리 대꾸를 해줘야 한다는 생각에 서둘러 머리를 굴렸지만 입이 선뜻 떼어지질 않았다. 작업장 쪽에서 세미를 부르는 윤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작업장 쪽으로 뛰어갔다. 공터를 가로질러 나오는데 저 쪽에서 경우형이 장갑을 끼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나를 흘끔 보더니 언제나 그렇듯 무표정한 얼굴로 지나쳤다. 인사를 해볼까 눈치를
보고 있다가 머쓱해져서 허공에 발길질을 한번 했다.

나는 어머니에게서 손을 빼내려고 필사적으로 발버둥쳤다. 그러나 어머니의 억센 손은 기어코 나를 여탕 앞까지 끌고 들어갔다. 같이 온 세미와 경주 아줌마는 표를 내고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땀이 흐르는 내 팔을 손으로 부욱 밀어보고는 등을 철썩 때렸다. 내가 아무리 나이에 비해 키가 작다고 해도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목에 줄이 매어진 강아지처럼 유리문 안으로 끌려 들어갔을 때, 바닥에 누워 있던 목욕탕 아줌마가 아는 체를 해왔다. 세미와 경주 아줌마는 벌거벗은 채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고 있었다.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밖으로 뛰어나왔다. 단숨에 세탁소 앞의 육교까지 달렸다. 더운 김을 쐰
것처럼 얼굴이 뜨거웠다. 숨을 내쉴 때마다 단내와 함께 후텁지근한 바람이 뿜어져 나왔다.
"저도 사내놈인데 고추 귀한 줄은 알것지잉."
젖어서 꼬불꼬불해진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문지르며 경주 아줌마가 말했다. 어머니는 나를 흘겼지만 미운 눈초리는 아니었다. 세미는 아직 덜 마른 머리카락을 느슨하게 묶고 부채질을 했다. 기분 좋은 복숭아 냄새가 풍겼다.
공터 구석에 짐을 내려놓은 경우형이 손을 털며 다가왔다. 그는 아줌마와 어머니는 본 체도 하지 않고 세미의 어깨를 쳤다.
"잠깐 얘기 좀 하자."
경우형이 멀어진 후 아줌마는 입을 삐쭉였고 어머니는 혀를 차며 무슨 말인가 하려고 했지만 이내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 날 저녁 부엌의 큰 통에 물을 받아 놓고 목욕을 해야했다. 어머니는 팔꿈치 살이 떨어져나갈 것 같이 세게 때를 밀었고 나는 소리를 지르면 옆집에 들릴 것 같아 얼굴만 찡그리고 있었다. 나무 한 그루 없는 골목인데도 밤중의 매미소리는 끊이질 않았고 이따금씩 술 취한 동네 아저씨들의 주정소리가 휘청거리다가 멀어지곤 했다. 부엌의 유리문 위로 골목 가로등의 주홍불빛이 으깨놓은 귤빛처럼 번져들었다. 문득 낮에 언뜻 보았던 세미의 둥그스름한 어깨가 떠올랐다. 나는 손등으로 물을 쳐 올리며 일부
러 심드렁한 투로 어머니에게 물었다.
"세미는 왜 여기 왔을까? 무시만 당하면서.."
어머니는 못들은 척 반대편 팔을 낚아챘다. 나는 응?, 하고 재촉해 물었다.
"아, 돈 벌라고 왔지, 왜 왔어."
별 거에 관심을 다 보인다는 듯한 어머니의 말투에 머쓱해진 나는 괜히 화를 내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돈 벌라면 큰 장사도 하고 그래야지, 맨날 공장에만 다닌대?"
어머니가 벌컥 온수를 틀자 뜨거운 물이 흘러 들어와 엉덩이를 뻐근하게 감쌌다. 어머니가 갑자기 뜨거운 물을 내 어깨에 끼얹었다. 나는 찬물 수도꼭지를 틀어 달아오른 얼굴을 부걱부걱 문질렀다.

학교 앞에서 산 금붕어를 들고 공장에 들리려는데 안에서 젊은 두 여자가 쫓겨 나오고 있었다. 윤씨의 욕지기 섞인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카메라를 목에 걸고 노트를 팔에 낀 그녀들은 공장 안으로 들어가려는 나를 불러 세웠다. 금붕어를 넣은 비닐봉지가 종아리에 닿자 물방울 하나가 도르르 다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공장에 부모님이 계시냐는 물음에 나는 어물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 여자가, 공장에 혹시 외국인들도 함께 일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아니 이 사람들이 아직도.. 이거 진짜 신고해버려야 하나."
불쑥 튀어나온 윤씨의 목소리에 나는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여자들도 주춤거리며 일어나더니 골목 쪽으로 돌아섰다. 윤씨는 흰자가 누런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금붕어에게로 눈길을 떨구었다. 이야기를 들은 작업장의 한 아줌마가 코웃음을 쳤다. 한번 크게 당해야 되. 불법취업자들 데려다가 쓰는 거 요즘 보통 문제 아니래요.. 어머니가 아줌마의 다리를 슬쩍 건드리자 아줌마는 세미를 흘끗 보더니 목소리를 한층 더 높였다. 아 내가 무슨 틀린 소리했나요, 나는요 솔직히 저 동남아 애들하고 같이 일하는 거 마음에 안 들어.. 어머니는 말을 돌리며
내게 그런걸 왜 사왔냐고 나무랐다. 나는 작은 금붕어 두 마리가 촛불 같은 꼬리를 흔들거리고 있는 봉지를 들어 보였다. 세미가 잠깐 고개를 들어 이 쪽을 보다가 다시 미싱에 얼굴을 묻었다.
A창고를 지나며 바닥에 떨어진 넥타이 하나를 주워 목에 걸었다. A창고는 재고 들어온 것이나 어딘가 잘못 만들어져서 버려진 것과 다름없는 것들을 모아두는 곳이다. 붉은 넥타이를 목에 느슨하게 동여매고 나니 배꼽 아래까지 내려왔다. 넥타이를 매면 저절로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허리를 펴고 금붕어 봉지를 오른손으로 바꾸어 들었다. 어머니는 늘 내게 훌륭한 사람이 되어 흰 와이셔츠에 반듯하게 넥타이를 매고 일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나는 넥타이를 만들어 내는 사람보다 그것을 매고 다니는 사람이 더 훌륭한 사람이라는 어머니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어른이 되면 어머니가 원하는 대로 어딜 가든지 언제나 깨끗한 와이셔츠에 넥타이만 매고 다니겠다고 다짐했다.

경우형의 성난 목소리를 들은 것은 그날 저녁이었다. 나는 어머니가 일을 정리하고 옷을 갈아입을 동안 건물 밖에 쌓아놓은 빈 상자 틈에서 놀고 있던 중이었다. 경우형의 목소리와 함께 튀어나온 것은 누군가의 비명소리였다. 후다닥 일어나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달려갔다. 콘테이너로 된 합동숙소였다. 당황한 듯 밖으로 나온 경우형이 나를 보더니 욕지기를 뱉고는 사라졌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서 있는데 숙소 안에서 흘러나온 불빛이 다리를 잡아끌었다. 슬그머니 안 쪽으로 걸음을 떼어 보았다. 훌쩍이는 소리를 듣고 들여다본 곳에서는 세미가 난장판이 된 바닥을 치우고 있었다. 엎어진 서랍 아래로 얼마 되지 않는 옷가지가 흐트러져 있었다. 세미는 인기척에 흠칫 놀라는 듯 하더니 나인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바닥에 떨어진 물건들을 주웠다. 이도 저도 못하고 어물거리다가 어머니를 불러올 참으로 돌아섰다.
"돈..있어."
세미가 말했다. 그리고는 확인이라도 해보이 듯 바닥의 장판을 몇 번 두드리고는 손을 내저어 보였다.
"돈 여기.. 안 훔쳐갔어... 말하지 말아요."
나는 문지방을 밟고 선 채로 바닥에 흩어진 편지지들을 내려다보았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내 이야기를 들은 어머니는 혀를 찼다. 어머니는 주머니를 뒤적여 열쇠를 꺼내며 그 놈은 언젠가 한번 혼이 나야 한다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가로등 주위에 깨알같은 날벌레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정말이지?"
내가 묻자 친구는 확신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깡통을 기울였다. 빙수용 팥이 들어있던 것인데 주워와 깨끗이 씻어서 금붕어를 담아놓았었다. 다홍빛의 금붕어 한 마리가 앞서 물 위로 떨어졌다. 금붕어는 개천을 따라 빠르게 떠내려갔다. 언뜻 보기에 천 조각이 떨어져 흘러 내려가는 것 같았다.
친구와 나는 아래쪽으로 재빨리 달려가 금붕어가 내려가는 모양을 보았지만 도무지 헤엄을 치는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고 정신없이 휩쓸려 가기만 하는 것 같았다. 두 번째 금붕어는 조금 내려가다가 모난 돌 틈에 끼어서 꼬리를 파닥였다.
"내가 너 때문에 못산다.."
어머니는 힘을 가득 주었지만 아프지는 않은 주먹으로 내 머리를 쥐어박았다. 옆자리 아줌마가 낄낄거리고 웃었다.
"당연히 죽지, 이것아. 다 저 살던 물에서 살아야지..."
세미가 직물을 들고 작업장에 들어서고 있었다. 무거운 것을 든 어깨가 떨리는 것 같았다. 나는 시선은 세미를 향한 채 어머니의 귓가 높이로 무릎을 낮추어 물었다.
"저렇게 돈을 벌어서 어따 쓰려고 그래?"
어머니는 미싱에 새 실타래를 걸며 민망할 정도로 큰 소리를 내어 대꾸했다.
"아, 너는 어린 게 뭔 오지랖이 그리 넓어?"
기분 상하게 계속 웃고 있던 옆자리 아줌마가 직접 물어보지 그러냐며 세미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내가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서 있자 아줌마는 괜히 나서고 들었다.
"장미야, 진영이가 너 어디다 쓸려고 그렇게 돈버는 지 궁금해 죽겠는데, 쑥스러워서 못 물어보겠단다."
그리고는 또 아줌마 혼자 킬킬대며 어머니를 흘끗 쳐다보았다.
어머니는 미싱을 돌리는 데만 열중하고 있었다. 세미는 땀에 젖은 이마를 손등으로 문지르며 나를 쳐다보았다.
"돈..."
중얼거리던 세미는 돌연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나와 아줌마를 살폈다.
"왜? ..왜..요? 돈, 왜요?"
경계심이 묻어나는 세미의 말투에 아줌마는 약간 당황한 빛을 띄더니 이내, 별 거 아닌 것 좀 물어보기로서니 뭘 그렇게 정색을 하냐고 쏘아붙였다. 세미는 입을 다물었지만 굳은 얼굴 위로 빠르게 움직이는 두 눈은 여전히 아줌마를 향해 있었다. 아니, 왜
저렇게 예민하게 군대.. 내 참 어이가 없어서.. 진영엄마도 봤죠, 쟤 눈 새파랗게 뜨고 보는 거. 그 날 저녁 쌔미가 그렇게 화난 모습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윤씨는 특유의 능글맞은 얼굴에 표정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 세미를 마주하고 있었다. 잔업을 한 것까지 다 계산되어 나와야할 급료가 맞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세미는 얼굴을 붉히며 따지고 들었다. 띄엄띄엄한 발음으로 뱉어내는 말보다 앞지르는 감정 때문에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니가 우리나라 사람들하고 똑같이 취급받겠다는 거냐, 지금? 주제도 모르고.. 이게 배가 불렀지, 그 만한 돈도 고마운 줄 알아."
윤씨는 코웃음을 치며 세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물러설 줄 모르고 급료를 내놓으라고 버티고 섰다. 윤씨가 세미를 향해 때리는 시늉을 해 보이더니 입을 씰룩였다.
"당장 꺼지고 일이나 해!"
돌아서는 세미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못 본 척 재빨리 시선을 돌리고 딴청을 피웠다
경우형과 세미의 대화를 들은 것은 나 혼자가 아니었다. 공장 내에 딸린 작은 식당의 주방 아줌마도 근처에 있었다. 아줌마는 숙소 건물 뒤의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퉁퉁한 발을 주무르고 있었고 나는 벽에 대고 혼자 야구를 하고 있었다. 불거져 나온 큰못에 옷자락이 걸리듯 거슬리게 귀를 잡아 끈 경우형의 큰 목소리에 눈살을 찌푸렸다. 아줌마는 발을 주무르던 손을 멈추고 몸을 약간 뒤로 민 채로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었다.
"이게 니 돈이라고? 웃기고 있네."
"신고할거예요. 돈주세요, 내.. 돈주세요."
나는 아줌마가 자리에서 일어나 경우형을 말리러 들어가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가만히 앉아 소리가 넘어오는 창 쪽으로 몸을 비스듬히 할 뿐이었다.
"신고? 끌려가면 니가 가지, 내가 왜? 저리 안 비켜?"
짧은 침묵이 흐르고 대화가 끝나는 듯 싶더니 이내 경우형의 짧은 비명과 함께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입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잠시 후 욕지기와 함께 들려온 소리는 발길질을 해대는 것 같았다. 나는 컨테이너 문 앞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경우형이 몸을 돌리다가 나와 마주쳤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손을 치켜들었다가 옷을 터는 척 하고 가버렸다. 그의 옆구리에 끼어있는 손가방이 눈에 따끔하게 박혔다. 뒤쫓아 나오던 세미는 나를 보더니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세미는 눈물을 문지르며 알아듣지 못할 외국말로 무어라 중얼거렸는데 다가가서 달래줄 엄두가 나지 않아 물끄러미 보고만 있었다. 뒤에서 바라보는 동그스름한 어깨가 이따금씩 부르르 떨렸다. 잠시 후 인기척이 나자 세미는 몸을 일으켰다. 그을린 듯한 갈색 피부 위로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입술이 하얘지도록 깨물고 있는 세미의 얼굴이 차갑게 느껴졌다.

경우형에 대한 소문은 금새 공장 안에 소리 없이 퍼졌다. 모두들 뒤돌아 그의 욕을 했지만 나서서 질책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른들은 본래가 겁이 많다. 기분 나쁜 일이 있으면 한바탕 붙고 깨끗하게 끝내는 우리들 같지 못하고, 바지에 오줌을 찔끔찔끔 지리듯 유치한 험담이나 흘리고 다니는 것이 고작이다. 며칠사이 유난히 광대뼈가 불거진 듯한 쌔미의 얼굴에서는 전에 없던 살기가 돌았다. 쉴 줄 모르고 미싱을 돌리고 일을 해대다가도 어느 순간 멈춰서 무언가를 지그시 노려보고 있는 세미를 보며 사람들은 저러다가 뭔 일이라도 낼 것 같다고 수군거렸다.
"야, 잠깐 이리 와봐."
공장 정문을 나서는데 누군가 나를 불렀다. 눈을 찡그리며 돌아보니 경우형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움찔했지만 곧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하고는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러자 경우형이 장갑을 벗으며 다가왔다. 그는 멈춰서 주위를 둘러보더니 내 팔을 끌고 가기 시작했다. 억센 손아귀에 잡힌 팔이 문틈에 끼어있는 것처럼 욱신거렸다. 팔을 뿌리치고 경우형을 쏘아보았지만 이미 골목 안까지 나를 데리고 온 그는 내 표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로 작업복 위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너 뭐 갖고 싶은 거 없냐?"
경우형의 예상치 못한 물음에 당황스러웠다. 얼마 전 옆 동네 아이와 한 판 붙었던 자리에서 주먹으로 코를 한 대 얻어맞았을 때와 같이 알딸딸한 기분이었다. 비싼 거도 괜찮고 뭐, 요즘 늬들 유행하는 게 뭐냐? 경우형은 골목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선 채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목덜미 위로 뜨거운 햇빛이 따갑게 흘러내렸다. 나는 주먹을 폈다 쥐었다 하던 손을 바지에 문질렀다. 문득 인철이 녀석이 바퀴 달린 신발을 타고 휙 내려가는 모
습이 머리에 스쳐지나갔다. 경우형은 울퉁불퉁한 골목 바닥 위로 침을 뱉어내더니 나를 흘끗 보고는 웃음 지었다.

어두운 개천가 모래 속을 더듬거리며 다리 기둥 아래쪽에 묻어둔 보물상자를 꺼냈다. 나는 재빨리 상자에 신발을 넣고 좀더 깊숙이 파묻었다. 온종일 귓가를 얽어매던 매미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고 오직 물 흐르는 소리만이 졸졸거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어딜 싸돌아 다니다가 이제야 오냐며 화를 낸다. 빨갛게 양념한 돼지고기가 식어 있었다. 어머니는 상추에 쌈을 싸주며 앞으로 공장에 드나들지 말라고 했다. 나는 입에 음식이 잔뜩 있어서 대답을 못하는 척 우물거리고만 있었다. 핀잔을 조금 받기로서니 그렇게 좋은 놀이터를 포기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음날만큼은 어머니의 말을 듣는 편이 좋았을 걸 그랬다. 내가 실내화 주머니를 휘두르며 공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일은 벌어지고 있었다. 좁은 작업장 안에 사람들이 둘러서 있었다. 다들 일손을 놓고 있는 것으로 보아 윤씨가 잠시 자리를 비운 것 같았다.
"이게 겁대가리 없이.. 이젠 헛소문까지 퍼뜨려서 사람을 몰아붙이네?"
경우형의 목소리였다. 지레 가슴이 덜컹하여 사람들 사이를 뚫고 들어가자 세미가 두 주먹을 차돌처럼 쥔 채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경우형은 목에 두르고 있던 수건을 집어던지고 세미의 어깨를 밀쳤다.
"말해보라고. 내가 니 돈을 가져갔어? 증거 있어? 너 증거도 없이 사람 몰아 붙이면 그것도 콩밥먹는 거 알아? 어디서 굴러먹던 외국 년이 생사람 잡네, 이거.."
세미는 볼에 힘줄이 설만큼 이를 물고 있을 뿐 입을 떼지 않았다. 증거 있느냐는 경우형의 말을 듣는 순간 가슴에 불이 와 닿은 듯 후끈거렸다. 경우형은 금방이라도 세미를 한 대 칠 듯 팔을 들었지만 시늉만 할 뿐이었다.
"애.. 사람이, 봤어요. 진영이 봤어요."
세미는 떨리는 목소리를 억누르고 더듬거리며 대꾸했다. 어른들의 시선이 내게로 몰렸다. 다리가 후들거리며 머리 속이 텅 비어진 것 같았다. 당황한 나는 입술을 깨문 채 가빠진 숨소리를 애써 죽였다. 경우형이 내 쪽으로 몸을 틀더니 큰소리로 물어왔다. 진영아, 얘가 지금 무슨 소리하는 거냐? 너 뭐 본 거라도 있으면 말해봐라.. 몸이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 같았다. 경우형이 내밀었던 묵직한 쇼핑백과 그가 주머니에서 꺼내 지불하던 종이돈이 팔락거리며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마른침을 삼키며 시멘트 바닥을 발로 문질렀다. 그때였다.
"아니 지금 남의 집 애는 왜 끌어들인대? 어이가 없어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나를 끌어당겼다. 나는 빨랫줄에서 낚아채지는 마른 옷가지처럼 맥없이 어머니 쪽으로 당겨졌다. 경우형은 신고할 거리가 있으면 맘껏 법대로 하라며, 네가 나한테 그딴 식으로 나와서는 곤란할 것이라고 비아냥거렸다.
"돈만 주면 결혼하겠다고 매달릴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사람 뒤통수를 쳐?"
어머니의 품에 묻힌 채로 곁눈질을 하는데 사색이 된 세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 후 벌레 떼를 쫓듯 사람들을 제자리로 흩어놓은 것은 윤씨의 신경질적이고 걸쭉한 목소리였다.

밖에서는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방바닥에 누운 채로 텔레비전 채널을 돌렸다. 버튼을 눌러대던 손이 멈칫한 것은 웬 가무잡잡한 외국인 남자의 뭉툭하게 잘린 팔이 눈에 들어왔을 때였다. 외국인 옆에 서있던 젊은 여자가 나서서 무슨 정부의 조치라느니 한국 기업의 비양심적인 만행이라느니 알아들을 수 없는 복잡한 말을 써가며 목소리를 높였다. 외국인 남자는 어깨로 눈물을 훔쳐냈다. 큰 눈이 젖어 있었고 입술은 굳게 물고 있는 채였다. 갑자기 어딘가가 시큰해지는 느낌이었다. 기분이 미지근하게 저려왔다. 나는 재빨리 채널을 돌려버렸다. 그러나 남자의 큰 눈은 머릿속에 남은 채로 선명히 떠올랐고 그것은 이내 세미의 눈동자가 되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도 꿋꿋하게 댕기는 거 보면 그 쪽 애들이 참 독허긴 한 거 같어. 아니, 난 걔들하고 내내 붙어 일했음서도 둘이 연애하는 걸 전혀 몰랐을까, 그래..."
아줌마는 찐 완두콩의 껍질을 벗겨 입안에 알맹이를 털어 넣으며 말했다. 어머니는 아줌마의 무릎을 치며 내가 있다는 눈치를 주었다. 아줌마는 능청스럽게 내 쪽으로 얼굴을 들이밀고 표정을 살피더니 어린애들은 들어도 모른다며 손을 저었다. 나는 세미가 얼른 공장에서 떠나기를 바랬다. 세미가 있는 공장에는 태연한 얼굴로 놀러 들어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공장내의 곰팡이 같은 소문과 시선에도 아무 말 없이 일만하는 세미가 무서웠다. 사람들의 이야기에 쓸려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하고 있으면 정말 죄지은 사람이 경우형이 아니라 세미 인 것 같은 착각이 들곤 했다.
비는 한동안 내렸다. 마루로 들이치는 빗줄기를 지루하게 내다보며 안으로 기어오르는 벌레들을 잡았다.

"진영엄마! 진영엄마, 빨리 좀 나와봐!"
동네 아줌마의 다급한 목소리에 눈을 떴을 때는 새벽 두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머니는 이불을 덮고 일어나 앉은 채로 방문을 밀었다. 비가 그친 듯 사방이 고요했다.
"아, 뭐해 빨리 나와보라니깐. 공장에 불이 났대!"
집에 있으라는 어머니의 말에도 나는 기어코 옷자락을 쥐고 공장으로 달려갔다. 먼 곳에서부터 매캐한 냄새가 풍겼다. 사람들은 떨어진 곳에 모여선 채로 붉게 솟아오르는 불길을 구경하고 있었다. 섬뜩할 정도로 높게 타오르는 불길은 검은 하늘을 사정없이 채찍질해댔다. 안에 사람이 있다는 누군가의 비명소리가 들려왔지만 신고를 했다는 대답만이 튀어나올 뿐이었다. 윤씨는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서는 정신이 나간 듯 사람들 사이를 휘젓고 다닌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 사이에 세미가 서 있었다. 눈동자 하나 움직이지 않고 치솟는 불길을 향해 서있는 세미를 보자 알 수 없는, 빳빳하고 서늘한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울리며 소방차가 다가와 멈추어 섰다. 사람들을 물러나게 한 소방대원들이 차에 감겨 있던 굵은 호스를 끌어내고, 몇은 몸보다 몇 배 부풀어 보이는 옷을 입은 채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세미가 슬그머니 사람들 속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 곁에 붙어선 채로 망설이다가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세미의 앞에 선 나는 막상 입이 떼어지질 않아 고작 한 일이라고는 타오르고 있는 건물을 가리킨 것이었다.
세미의 눈이 불안스럽게 나를 훑어 내리더니 내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누군가를 구해냈는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주위를 살피더니 창고로 달려가 짐 가방과 몇 개의 종이가방을 들고 황급히 공장을 나섰다. 불룩한 종이가방 밖으로 비죽 나와있던 넥타이들이 그녀의 다리에 부딪쳐 땅에 떨어졌다. 우뚝 멈춰선 세미가 내 눈을 쏘아보며 말했다.
"너희들은... 다 똑같애."
세미의 또렷한 발음이 머릿속을 찌르고 들어왔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멀어졌다. 불길을 제압하고 난 공장 건물은 시커먼 밤하늘보다도 더욱 어두운 빛깔이었다. 추적추적, 뒤늦어서야 내린 빗물이 어깨를 적시기 시작했다.

"세상 무섭네, 다들 이렇다 저렇다 해도 나는 걔 생긴 게 워낙 순해 보여서 애는 착해먹겠다 싶었는데..지가 경우한테 당했음 그 놈한테만 해코지할 것이지 왜 공장엔 불을 지른대. 미친 가시내 아냐?"
나는 어머니의 무릎 옆에 붙어 막 잠이 들려 하고 있었다. 눈은 감기고 머릿속은 이미 잠의 물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지만 방안의 이야기 소리만은 여전히 바람의 울림처럼 들려왔다. 잠으로 빠져들면 들수록 뜨거운 손가락 같은 것이 내 머리를 힘주어 누르는 기분이 들었다. 불길이 날름거리며 머리 주변을 핥아댔다.
공장에 사람들이 나와 세미의 주변을 둘러싸고 뜨거운 햇볕은 누런 현기증을 불러일으킨다. 세미의 시선은 애써 피하려 해도 내 눈동자에 꼿꼿하게 내려꽂혔다. 곧 주변에서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사라지고 넓은 공장에서는 세미와 나만이 마주보고 서 있다.
그녀의 새까만 눈동자를 보고 있던 두 눈이 달아오른 듯 뜨겁다.
세미의 두 눈동자는 벌겋게 달궈진 돌멩이가 되어 내 머리를 향해 굴러왔다. 무어라고 쏘아붙이는 세미의 목소리. 정확한 발음이었지만 내 귓가에 부옇게 안개가 막아선 듯 잘 들을 수가 없었다. 돌멩이는 금방이라도 내 머리를 터뜨릴 듯 요란하게 눈앞으로 굴러오고 있었다.
"아니, 얘가 왜이래? 진영아!"
어머니의 목소리와 함께 몸이 심하게 흔들렸다. 나는 가까스로 눈을 떴다. 걱정스러운 표정의 어머니와 아줌마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머니는 식은땀에 젖은 내 이마를 쓸어 넘기며, 불구경을 해서 그런 거라고 냉수를 한잔 마시고 다시 편히 자면 괜찮을 거라 했다.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개천으로 갔다. 젖은 모래 사이로 상자가 드러나 있었다. 망설일 여지도 없이 그것을 들고뛰기 시작했다.
경우형은 창고 안에서 직물을 확인하고 있었다. 나를 발견한 그는 손을 들어 아는 척을 했다. 그러나 나는 말없이 그에게서 얼마쯤 떨어진 곳까지 다가가서는 냅다 신발을 집어던졌다. 그리고 돌아서서 곧장 달음박질쳤다.

비가 개인 하늘은 가벼워 보였다. 몸 속까지 후끈하게 데우고 들던 더위가 한풀 꺾이고 해질 무렵이 되면 제법 선선한 바람도 불었다. 나는 손위로 모래를 다독이며 쌓아올렸다. 주위에는 적당히 불룩하게 뚫어놓은 두꺼비집이 두 개 있다. 언젠가 길게 만들
어 놓은 터널을 가리키며 쌔미가 지나가는 소리로 말했던 것이 떠오른다.
"저거.. 지나서 밖에 나오면.. 환해져... 좋아요."
그러나 모래로 만든 터널은 물이 두 번 이상 통과하기도 전에 다 무너져버리고 만다. 빠르게 달려가던 물은 채 빠져나오기도 전에 무너진 모래 속에 묻혀 스며 사라져버린다.
작업장에서 직물에 파묻힌 채 미싱의 페달을 밟는 자그마한 체구의 세미를 보고 있으면 그녀 또한 길고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가기 위해 정신 없이 달리고 있는 것 같았다. 돈을 벌기 위해 찾은 한국에서도 끝내 터널의 밝은 끝을 찾지 못한 채 도망쳐버린 세미의 뒷모습이 어른거렸다. 한참동안 공들여 터널을 뚫어놓은 나는 양동이의 물을 도로 개천에 쏟아 붓고 둥그스름하게 솟은 천장들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공장에는 사고 인원을 보충할 겸 새로운 외국인 노동자들이 몇 더 들어왔다. 그 중에는 세미를 닮은 여자도 보였다. 윤씨는 그녀에게 별명을 붙이고 사람들은 멋대로 그것을 따라 불렀다. 그녀는 밤마다 남아 잔업을 했다. 나는 더 이상 공장에 자주 드나들지 않았다.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개천가에 여름내 열심히 울어대던 매미가 죽어 있었다.
그것을 집어 터널 안에 가만히 밀어 넣어 두고는 집으로 향했다.

  • 중앙대 건강간호대학원
  • 보험심사관리사 자격과정
간호사신문
대한간호협회 서울시 중구 동호로 314 우)04615TEL : (02)2260-2571
등록번호 : 서울아00844등록일자 : 2009년 4월 22일발행일자 : 2000년 10월 4일발행·편집인 : 신경림  청소년보호책임자 : 신경림
Copyright(c) 2016 All rights reserved. contact news@koreanursing.or.kr for more inform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