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회 간호문학상 수필 당선작
밥상을 차리며
[편집국] 편집부 news@koreanurse.or.kr 기사입력 2008-01-03 오전 10:14:19

밥상 차리는 일을 즐겨하지는 않지만 퇴직하고 나니 어쩔 수 없이 전업이 되고 말았다. 어설픈 마음 서툰 솜씨로 열심을 내다보면 어느새 2~3시간이 훌쩍 지나버리는데 내놓을만한 음식은 별로 없고 맛도 신통치 못하다.
이런 내 솜씨를 예쁜 그릇으로나 튀어볼까 하고 이것저것 찾아본다. 나물종류는 단순한 문양의 접시가 깔끔하겠지. 부침종류는 조금 화려한 접시가 좋겠고 또 김치, 생선, 양념간장은 어느 그릇에 놓는 것이 좋을까 하고 그릇을 찾다보니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어릴 적에 밥상에 오른 그릇들은 주로 놋그릇, 양은그릇, 사기그릇, 질그릇 등이었다. 명절이 되면 형님들은 양지바른 마당에 둘러앉아 누리끼리해진 놋그릇들을 기와가루와 짚을 이용하여 어깨가 아프도록 문질러댔다. 일 년 내내 대가족의 울안에서 쌓이고 구겨진 그들 마음속의 앙금들을 털어 내는 듯한 그 손길이 힘겨워 보였다.
그러나 마당 안 가득히 차 있는 형님들의 웃음소리에 시샘어린 눈길들은 담장을 넘어왔다. 그렇게 반나절쯤의 시간이 지나면 칙칙하던 놋그릇은 황금빛 화려한 색깔의 새 그릇이 되었고 명절 상에서 반짝반짝한 눈웃음으로 명절 분위기의 흥을 돋우어주었다.
형님들은 밥상에 올리는 그릇들을 반드시 격에 맞추어 사용했다. 어른들의 주식용은 놋그릇을, 김치, 물김치는 널찍하고 오목한 그릇을. 나물류는 조금 납작한 접시에, 생선은 길쭉한 그릇에, 간장은 조그마한 종지 등이었다. 왠지 나의 관심은 늘 그 쪼그마한 간장 종지에 쏠렸었다. 밥상 위의 반찬들은 이미 다 간을 맞추었고 가족들의 손도 별로 가지 않는 것 같은데 고 쪼그마한 게 왜 꼭 상에 올라야 하는지를….
사회 초년생이던 시절에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 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그릇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는 말씀이 내 마음에 크게 부각되었다.
나는 이 사회에 과연 어떤 그릇이 될 것인가? 주식을 담는 크고 멋진 그릇, 반찬 종류를 담는 화려하고 예쁜 접시, 아니면 그 쪼그마한 간장 종지. 그러나 중요한 것은 크기나 모양이 아니라 쓰기에 합당한 깨끗함이 아니겠는가.
밥상에도 각기 목적에 따라 다양하게 쓰이는 그릇이 있는 것처럼 우리사회도 각양 전문성을 띤 인격체로 구성되어야 건강하게 발전할 수 있으리라. 각자 자기 그릇의 크기와 명성에만 치우치지 말고 이 사회가 기대하는 건실함으로 깨끗하게 준비되어 갈 때에 귀한 재목으로 쓰임 받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크고 멋진 그릇이 되기 원한다면 난 차라리 어느 밥상이든 필요로 하는 작은 간장 종지가 되자. 이미 밥상 위의 모든 음식은 간을 맞추었지만 또 누군가의 필요를 위하여 빠지지 않고 오르는 작은 간장 종지.
크고 화려한 그릇으로의 욕심을 부릴 수 없는 여러 가지 요인들도 있었겠지만, 그러나 주어진 환경에서 열심히 최선을 다하며 살아온 세월에 후회나 미련은 없다.
그저 잔잔한 기쁨과 감사와 뿌듯한 보람으로 만족하며 강산이 서너 번 바뀔 정도의 긴 세월을 한 조직체 안에서 귀하게 쓰임 받았고 또 그렇게 쓰임 받을 후진들이 있어 행복해 하며 떠나왔으니….
퇴직 후 새로이 시작되는 나의 생활, 이제 또 하나 욕심내 보는 밥상이 있다. 그동안 방치되어 있던 정서적 감정들을 일깨워 가며 수필의 밥상을 차리고 싶다. 수필의 밥상을 차리기 위하여 새로운 감성과 다양한 시각으로 어딘가에 숨어 있는 언어의 고운 그릇들을 찾아야 한다. 맛깔스러운 수필의 밥상을 차려서 사랑하는 이들을 초대해 보자는 꿈을 꾸면서 즐거워지는 마음으로 밥상을 차린다.
김 영 자(전 일신기독병원 간호부장)